수첩속 거짓말

잭 다니엘스

야가다 2020. 3. 30. 21:47

'만유인력'

 

만유인력 [universal gravitation, 萬有引力]
모든 물체 사이에 보편적으로 작용하는 인력. 우주에서 천체의 운동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힘이다.

 

 "미안해"

 

 내가 그녀에게 들은 마지막 이야기였다. 그녀와 헤어졌을 때 나는 나나 혹은 그녀가 둘중에 누군가 서로 끌어들이는 힘이 부족한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우린 멀어진거라고. 하지만 그 생각은 잘못 되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인력은 상호작용하며 일정한 것이었다. 아마 내가 그녀를 끌어당기고 있었더라면, 그녀 역시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서로의 사랑에 대한 질량차가 존재했던 것일까?


 아니다. 애초에 서로에게 영향을 줄만한 인력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인력을 작용하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가벼운 존재였다. 그 뒤론 그녀를 볼 수 없었고 그것으로 끝났다.


 빌어먹게도 난 술을 잘 마시질 못한다. 기억을 잊기 위한 도구로 뇌를 깰만한 알콜만큼 좋은 것도 없을 터인데, 이는 B도 마찬가지여서 B와 난 비교적 맨 정신으로 대화를 나눌때가 많았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B는 내가 아는 가장 오래된 친구라는 점과 비교적 나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십 수년 동안 뿌옇게 쌓인 먼지만큼 그 와의 관계도 그랬다. 왠만한 바람이 불어선 날아가질 않는다. 더럽기도 하고.


 "난 가끔 여자를 모르겠어."

 

 B가 말문을 먼저 열었다.

 

 "왜? 갑자기."

 

 "여자들이 화를 내는 거 말야. 대체 왜 화를 내는 걸까?"

 

 "당연히 너가 잘못 했으니까 화를 내는 거겠지."

 

 괜히 손안의 라이터를 이리저리 뒤적인다. 라이터의 목적은 담배가 아니다.

 

 "가끔.....그네들은 화를 내는게 화를 내는 진짜 목적이 아닐까 싶어."


 그리곤 B와 다트를 던졌다. 가끔 못마시는 술을 마신 날이면 B와 난 술을 깨기 위해 다트를 던지곤 했다. 취하기 위해 마시고 깨기 위해 다트를 한다. 이 모순적인 행동은 모두 한장소에서 이루어진다. 애초에 왜 술을 마셨지?

 

 쓸데없는 질문들이 계속 머리에 멤돈다. 좀 닥쳐.
 

 머릿속의 질문을 없애기 위해 다트를 손에 쥐고 과녁에 집중해본다. 다트 과녁엔 잭 다니엘스의 커다란 로고가 새겨있었다. 내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달리 다트를 던질 땐 주로 정중앙을 맞추려 노력하기보단 20점 과녁을 맞추는 데 주력했다. 사실 다트엔 이게 정답이다. 국제대회를 봐도 확률로 따져봐도 맞지도 않는 정중앙보단 이게 낫단말이다. 그렇지만 이 필승의 최선책도 몇가지 한계가있다. 일단 왼쪽과 오른쪽엔 1점과 5점짜리 과녁이 있고 높이를 잘못조절 해 떨어진다면 3점에 맞곤 한다.


 B는 그런 날 비웃는다.

 

 "넌 다트를 몰라. 다트는 인생과 비슷해서 안정성이 높은 차선(次善)을 선택한다고 해서 무조건 성공하는 것은 아니거든. 너처럼 그렇게 안정된 것만 추구해서 바른 길로만 나아가다 보면 언젠간 니 울타리에 갖히고 말껄? 거기다 가끔 차선(次善)이 아닌 차악(次惡)을 고르기도 하잖아?"

 

 녀석은 아마도 정 가운데를 노리는 것 같다.


 "인생이란 한방이야. 무조건 정 중앙만 노리는 거지. 딱 한방이면 돼. 그 한방의 쾌감을 모를껄?"

 

 녀석은 잔뜩 조준을 하더니 결국은 15점,8점, 20점 짜리에 맞는다. 사실 다트 챔프라도 정 가운데에 맞추긴 힘들다. 이번엔 내 차례다.

 

 "그렇지만 그 최선의 대박이라는 건 성공률이 극히 낮다구. 그럴바에야 안정감이 있는 차선이 나아."

 

 20점, 20점, 3점. 동점이다.


 녀석은 다트와 같은 상표의 위스키를 한잔 주문해 마시고는 다시 다트를 잡는다.

 

 "그래서 차선이라는 것의 결과가 겨우 이거야? 결국은 헛된 것을 쫓는다고 비웃던 너나 나나 결국은 다를게 없잖아?"


 18점, 15점, 9점.

 

 다트의 묘미는 빠른 승부에 그 맛이 있었다. 누구나 할 수 있을만큼 쉬웠고 누구나 할수 있을만큼 다트는 가벼웠다. 그러나 그 가벼움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듯 했다.

 

 "다를게 없다니. 자신을 위해 꾸준히 노력해온 사람하고 일확천금의 운이나 꿈꾸는 사람하고 같단 말야?"


 5점, 1점, 20점.

 

 승부엔 냉정함이 중요하다. 난 이런 면에선 부족하다. 다시 녀석의 차례다.


 "바보아냐? 일확천금이라는게 단지 운인줄 알아? 일확천금이라는 것도 엄청난 노력의 댓가라구. 당장 지금만해도 저 골든을 맞추기 위해 난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지. 단지 운으로 치부해 버리는 건 그들에 대한 모욕이고 질투일 뿐이라구."


 15점. 12점. 17점.


 골든을 맞추지 못했지만 결국 녀석의 승리다.
 

 꽂혀 있는 다트를 뽑으며 녀석은 바텐더에게 위스키 두잔을 더 주문했다.

 

 "이 위스키, 너가 사는거야."

 

 "내가 왜?"
 

 "내가 이겼잖아."

 

 "애초에 내긴 하질 않았는데."

 

 결국 녀석은 몇년후에 골든을 맞췄다. 골든을 맞춘 다음에 녀석은 다트를 그만둬 버렸다. 왜 그만뒀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단지 한가지 알수 있는건 여전히 그는 하루에 2잔뿐이지만 잭 다니엘스를 마셨고 난 여전히 20점 과녁을 조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날 공기와 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