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첩속 거짓말

어떤 전화

야가다 2020. 4. 24. 20:22

[LG텔레콤] 오늘까지 요금 미납시 내일 아침 08시부로 이용이 정지됩니다.
 
밤 늦게 전화기가 부르르 요동치는 소리에 잠에서 깨 액정을 보니 이런 문구가 떠 있었다. 내 전화지만 나완 별로 상관없는 문자다. 가입도 내 이름이 아닌 귀현이가 아는 사람으로 가입되어 있었고 요금 안낸다고해서 내가 신용불량자가 되는 것 또한 아니었다. 어차피 내겐 처음부터 전화를 걸거나 받는 것 따위는 체질에 맞질 않았다. 체질에 안맞는다고 해서 전화를 쓰면 몸에 두드러기가 안다던가 하는 물리적인 반응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전화가 오게 되면 무언가 자신을 얽메고 있는 듯한 사슬을 느끼게 되고 그 조이는 느낌이 싫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발신자 표시에 표시된 혹은 문자메세지에 표시된 이름과 전화번호를 쉽게 저주하고 경멸하기도 하고 욕도 해보았지만 그 사슬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이런 행위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상처내고 괴롭게 하기도 했는데 당분간 이런 것에서부터 자유라니 약간 개운하기도 했다.
물론 전화가 없음으로 인해 주위에서 답답하다고 전화 사라고 성화를 칠 것은 뻔하나 어차피 있어도 원래 잘 받질 않았으니 별로 불편함을 느끼진 않을 것이다.
난 잠을 깨운 전화를 홧김에 방 구석으로 던져버리려다가 종료버튼을 눌러 시간을 확인하고 베개 근처에 두었다. 전화가 되질 않는다고 시계 기능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파랗게 빛나는 액정은 언제까지 켜져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밝았지만 이내 사그라 들었다.
새벽 두시반이라 한창 잠을 잘 시간이지만 한번 잠을 깨어서인지 쉽게 잠이 오진 않았다.
'이제 끝인가?..'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음껏 들이켰다고 생각되었을 무렵 전화기는 자신의 존재를 재차 나에게 알려왔다. 새벽 3시에 전화 올 곳은 몇 곳 없었다.
난 잠시 받을까 말까 잠깐 망설였지만 결국 전화를 받기로 했다. 마지막이 왜 하필 이 사람일까?
 
"어.... 왠일이야... 이 시간에...."
"그냥.... 잠이 안와서...."
"그래... 내일 첫 출근이잖아... 어서 자."
 
그녀는 나보다 세살 많았고 서울의 모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해 자신이 졸업한 모교에서 자신의 후배들에게 자신이 배운 러시아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한총련을 지냈고 민노당의 활동에 열성인 그녀는 내가 쓴 글이 좋다고 했고, 내가 듣는 음악이 좋다고 했다. 또 내가 말하는 목소리를 좋아한다고 했으며 내가 사는 삶 또한 좋아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언제나 내게 '넌 너무 삶을 심각하게 생각'하므로 '좀 더 즐겁게 살아야' 된다고 이야기 하곤 했으며 나에게 이것저것 말하고 충고하기를 좋아했다.
 
"그래, 걱정해 줘서 고마워... "
"어... "
"......"
"......"
 
무언가 지나간듯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마치 건너편 인도에 고라니라도 지나가 그것을 구경하느라 건너편 인도의 모든 사람이 거기에 집중하는 듯한 어색한 침묵이었다. 난 그 어색한 침묵을 견딜수가 없었다.
 
"그래... 그럼 이만 끊을게. 잘자."
 
그리곤 상대의 전화기가 꺼질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그렇지만 상대는 전화를 끊지 않는다.
 
"........ 잠깐만...."
난 이미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었다.
"나한테... 나한테 더 할 이야기 없어?"
".................응....미안.. 없어... 잘자..."
 
그리곤 더 이상 기다릴 것 없이 이번엔 내쪽에서 전화를 먼저 끊었다.
그리곤 아까 하지못한 일을 해 버렸다. 방구석에서 전화기가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 오늘밤 누군가에게서 다시 전화올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다시 잠이 들기도 힘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