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가다 2020. 4. 24. 20:33

퇴근시간이 지난 지하철은 한산하다. 7명정원의 시트에 한두명이 앉는 것은 기본, 가끔 운이 좋으면 한 칸 전체를 혼자 앉을 수도 있다. 단지 30~40분의 차이로 만원 지하철의 지옥과 이런 지루한 천국이 이 좁은 지하철의 공간에서 왔다갔다 하는 것이다.
 
그런 지루한 지하철이 8호선으로 갈아탈수 있는 잠실에 도착했을 때 자동문 사이로 어떤 소녀가 들어왔다. 그 소녀는 내 건너편의 끝자리에 걸터앉았다.
 
사실 말이 좋아 소녀지 겉 외형으로만 본다면 조금 아니 좀 많이 못생긴 편이라 소녀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얼굴은 사각턱에 피부도 그다지 별로 좋아보이지 않았고 쌍꺼풀이 없는 눈은 길게 찢어져 있었다. 거기에 분홍색의 약간 작은듯한 오리털잠바와 대충 정리도 안한듯 헝클어진 단발머리는 왠지 그 소녀를 더욱 싸구려 틱 해 보이게하기 충분했다.
 
그 소녀는 조금 앉아있던가 싶더니 이내 일어나 지하철 노선도를 이리저리 살피는데 도통 뭐가 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리곤 주위를 둘러보더니 곧 내게 말을 걸어왔다.
 
"저기요...지금 위치가 어딘지 좀 알려줘요.."
 
방금 잠실에서 탔으면서 현재 위치가 어딘지도 몰라? 난 자리에서 일어나 문 위에 붙어있는 노선도를 보며 현재 위치를 설명해줬다.
 
"방금 지나온데가 8호선을 탈수 있는 잠실이구요. 지금 가는 곳이 성내에요."
 
그리고 난 지하철 노선도의 오른쪽 부분을 가리켰다. 그렇지만 그 소녀는 이해를 하지 못한 듯하다.
 
"근데요.. 정말 자신이 그 역을 향해 가고 있다고 믿으세요?."
 
"네?"
 
" 아닐수도 있잖아요. 이 열차가 속이고 있는 걸 수도 있다구요. 그런 생각은 전혀 안해보셨어요?"
 
물론 나도 그런 생각을 전혀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왠지 스스로가 바보 같아 종종 그만두곤 했었다. 왠지 한심하지 않은가? 그리곤 그 소녀는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은 바보로군요? 이 지하철이 어디로 우릴 인도하는지. 어디로 우릴 데려가는지도 모르면서 매일 아무 생각없이 이 지하철을 탄다구요? 하. 당신이 정말 성내역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지하 깊숙히 전혀 다른 세상으로 우릴 데려가고 있을지도 모른다구요. 그런 거 한번 의심해보지 못하다니 생긴건 멀쩡한 사람이 쯧쯧쯧..."
 
지하철 안내방송이 다음역에 가까이 왔음을 알려주었다. 난 내릴 곳은 세정거장이나 뒤이지만 왠지 상대하기 귀찮아 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물론 저도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요. 날 속이고 있을지 모른다고. 그렇지만요. 전 적어도 당신과는 달리 돌아갈 곳이 있고 내려야 할 목표가 있어요. 현재 자신의 위치조차 찾지 못해 헤매는 당신보다는 낫다구요."
 
그리고 야유하는 그 소녀를 뒤로하고 지하철을 내렸다.
 
그렇지만 그곳은 처음에 내가 내리고자 했던 그 곳이 아니었다.
 
대체 난 왜 여기서 내린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