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가다 2020. 4. 24. 20:48

새벽 2시 쯤 되었을까, J는 눈을 떠 조심스럽게 옆에 누워 있는 B가 깨어있지 않은가 확인한다. 다행스럽게도 B는 아직 자는 듯 하다.
 J는 B가 자는 것을 확인하자 조심스럽게 침대 밖으로 빠져 나온다. 이불이 젖혀지는 부스럭 소리에 J는 가슴이 멎은 듯 하다. 침대의 삐끄덕 소리에 B가 몸을 뒤척였을 때는 B가 혹시 깨어나는게 아닌가 조마조마해 하기도 한다.
 무사히 침대 밖으로 빠져나온 J는 방 안 구석에 서랍장으로 가 서랍을 뒤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찾는게 없었는지 목표를 방 한쪽에 걸려있는 B의 옷으로 바꾼다. 그 옷을 B가 어제 입고 나갔던 옷이다.
 J는 그 옷을 조심스럽게 뒤져 지갑을 꺼낸다. 그리고 현금과 수표 몇장을 챙긴다. 지폐를 꺼낼 때 사각하는 소리에 맞춰 스스로 놀라 조금 멈칫하지만 결국 원하는 액수를 모두 꺼내고 다시 지갑을 B의 원래 주머니에 조심스럽게 넣어둔다.
 그리고 다시 침대의 원래 자리에 조심스럽게 눕느다. 조심스럽다곤 해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이상 조금은 거칠다.
 그리고 다시 J가 잠들고 모든게 조용한 침묵의 소리를 낼 때 B가 눈을 뜬다.
 
 
 
 B와 J는 고등학교 때 만난 사이였다. 그 때 그 둘은 꽤 친한 반 친구로 지냈지만, 졸업후 B가 장교로 입대했을 때는 왠지 서로에게 단순한 친구 이상이 되어 있었다. 장교로 입대하고 2년후 둘은 결혼했고 또 2년후 J는 딸 N을 낳았다. B는 전역후 사업을 시작해 꽤 성공을 거두어 그 뒤로 그들은 그대로 잘 살아가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 둘은 겉에서 보기와는 달리 꽤 심한 균열이 있었다. 그 균열은 그 둘 관계에서도 있었고 개인적인 성격에서도 드러났다. 우선 J는 B를 사랑하고 전업주부로써 사회생활을 그다지 못한다는 것에 불만이 없었지만 N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J는 B을 보모나 유모에게 맡기고 하루종일 쇼핑을 하거나 마사지를 받으러 가거나 운동을 하며 지내곤 했다. 한마디로 그녀는 현재를 즐기는데 노력하는 듯 했다. 또 그러다 보니 굉장히 소비가 심했고 J가 검지손가락으로 가리친것은 곧 모두 J의 소유가 되곤 했다. 이러다 보니 B까지 파산의 위험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듯 했다..
 B 역시 균열을 보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B는 굉장히 열정적이면서 냉정했다. 그는 언제나 이런 모순적인 부분에서 줄타기하듯 균형을 맞추는 것을 좋아했다. 또 그런 자신의 이중적인 모습을 사랑하고 좋아했다. 그렇지만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그는 언제나 조작주의의 위험을 내부에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장교시절 그 이전부터 모든 것을 자신의 의지대로 행하려 하였고 그렇지 못했을 때는 굉장히 화를 내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J로 인해 B에게 예금 잔고 부족 통지서가 날아오자 B는 꽤나 냉정하고 치밀하게 계산해 빚을 해결하고 J에게 열정적으로 소비를 줄여야 한다고 설득했다. 아니 설교했다.
 물론 처음 얼마간은 J도 자신이 심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소비를 점점 줄여나갔지만 이미 그녀는 지독한 쇼핑 중독자였다. 그렇게 몇 개월 지나지 않아 그녀는 다시 엄청난 액수와 많은 양의 물건을 사들였다.
 그렇게 지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 2번째 통지서가 날아들었고 B는 당연히 그것을 보게 되었다. B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냉정하게 생각하고는 J를 설득하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J는 자신이 실수하였다는 것은 인정하였으니, 도무지 B가 왜 1시간이고 2시간이고 이 문제에 관해 목에 힘을 주어 이야기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J가 생각하기에 아직 자신들은 꽤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고 이 정도의 소비는 당연하다고 생각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J는 아직 B를 사랑했기 때문에 B의 의견을 받아들여 소비를 줄이겠다고 겉으로나마 약속 하였다.
 그렇게 겉으론 일단 수습되는 듯 했으나 B의 내부는 그렇지 못했다. 이미 이야기 했듯이 B는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다. 폭 넓은 사고를 가지고 있었고 머리가 좋았으며 냉철했고 또 열정적이었다.
 그렇지만 반면에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그는 자기 중심적이었으며 이견을 인정하지 못했다. 그런 그였기에 그가 사랑했던 J의 약간이지만 반박을 더욱 예상하지 못했고 그런 것이 더욱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는 고민했다. 과연 어떻게 해야할지 열정적인 그와 냉철한 그는 하루에도 수십차례 이 문제로 논쟁했고 다투었다.
 그리고 몇 개월 지나 J가 B의 지갑에 손을 댄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때 B의 내부는 거의 붕괴 직전에 몰려있었다.
 
 H와 술을 마시게 된 것은 그런 위기가 계속 되던 때였다.
 H와는 사업상 알게 된 친구였는데 사실 나이는 B쪽이 2살 많았지만 B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B는 H와 있을 때 오히려 형을 만난 것 처럼 굉장한 편안함을 느끼곤 했는데 그것은 겸손하고 말이 없는 듯 하지만 꽤 폭 넓고 깊은 지식을 지닌 듯한 H의 성격 때문이었다.
 처음엔 어느때처럼 사업의 이야기와 세상의 일로 이야기를 끌어낸 두사람은 어느정도 술이 들어가게 되자 점점 자신의 신상에 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주로 B가 이야기를 하고 H가 듣는 쪽이었지만 H의 적절한 대답과 추임새 때문인지 B의 이야기가 끊기는 일은 없었다. 마치 제 3자가 본다면 B만 술을 마셔 마구 떠들어대고 H는 전혀 취하지 않은 듯 보이기도 했다.
 B가 한창 그렇게 자신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어느덧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J의 이야기로 넘어가게 되었다. B는 술에 취해 평소의 냉철한 모습은 어디간 채 흥분해 마구 J에 대해 떠들어 댔다. 그런 B를 H는 가만히 웃으며 지켜 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그 둘이 헤어질 때 H는 B에게 작은 명함을 주었다. 그 명함엔 '구조 컨설턴트 O'라고 이름 세글자오 전화번호만 적혀 있었고 주소라든가 위치라던가에 대한 정도는 아무것도 없었다.
 "B, 자네에게 도움이 될거야. 내가 소개 시켜줬다고 하면 알껄세."
 
 집에 돌아오고 다음날 회사에 출근한 B는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지갑을 확인하였다. J가 B의 지갑에 손을 댄 이후 어느덧 자신의 일과가 되어버린 듯한 행동이었다.
 없어진 돈을 확인한 후 B는 수첩을 꺼내 없어진 돈의 액수를 적었다. 계산해 보니 이번달에만 3000정도 되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해 수첩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왜 그녀는 날 실망시키는가 라는 생각만 머리에 가득하였다. 왜 나를 속이는가 라는 생각에 심한 배신감과 모멸감까지 느껴 주먹이 부르르 떨리기도 했다. 심지어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기까지 했지만 돈 얼마에 이렇게 흥분하는 자신이 부끄럽고 왠지 창피했다. 심지어 천박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생각이 이렇게 들자 그는 이내 이성을 되찾았다.
 오늘 이 수첩을 J에게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를 해 볼 것이다. J가 이번에는 자신을 이해해 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자신도 평안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B는 자리에 일어나 자신의 수첩을 주으려했다. 떨어진 수첩의 옆에는 눈에 익은 종이가 떨어져 있었다. 어제 H가 주 O의 하얀 명함이었다.
 B는 O의 하얀 명함을 보자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다. 마치 명함의 흰 바탕에 강렬한 검은 글씨가 자신에게 이야기 하는 듯 했다. 벌써 2번이나 설득을 했지만 통하지 않았잖아. 이번엔 통할 것이라 생각해? 그런 생각이 들자 사그라 들었던 모멸감과 배심감. 굴욕감이 스멀스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리곤 걷잡을 수 없이 B의 마음을 지배해가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꺼내 명함에 적혀 있는 번호를 누르기 시작햇다. 번호를 하나씩 하니씩 누를 때마다 마음은 오히려 조금씩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번호를 다 누르고 통화를 누를때엔 오히려 평상시보다 더 차분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벨소리가 울리고 정확히 2번만에 전화기 저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사합니다. S구조 설계 사무실입니다."
 B는 침을 한번 삼킨뒤 혹시 O의 사무실이 아닌지 물었다.
 "네, 제가 O입니다만."
 O라고 밝힌 사내의 목소리는 의외로 굉장히 젊은듯한 목소리 같았다. 그렇지만 장난끼가 있는 듯하지만 차분하고 무겁고 낮게 깔린 목소리는 나이를 예측하기에 꽤 힘들었다.
 "저... 제 아내 문제로 전화 드렸습니다."
 약간 정적이 흐르고,
 " 전화를 잘못 거신 듯 하군요. 저희는 구조설계 전문 회사로써 가정문제를 상담하지 않습니다."
 "H의 소개로 전화드렸습니다."
 B는 O의 말을 약간 끊고 이야기 했다.
 ".......H 입니까? 그렇군요. H에겐 전에 빚진 것도 있으니....."
 ".........."
 "좋습니다. B씨라고 했지요? 2주동안 잠시 당신의 아내를 빌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당신 부인에게 관심도 없을 뿐더러 손끝하나 대지 않으니까요. 그건 저희쪽 직원도 마찬가지 입니다. 약속하지요. 다만, 저희는 2주동안 대신 당신 부인의 아주 작은 '무언가' 하나만을 가져갈 뿐입니다. 사례는 필요 없습니다."
 짧은 시간동안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O의 소리에 B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다시 정신을 정신을 차리고 무언가 말하려 하였다. 그렇지만 O는 일방적으로 통보만을 하고 끊어버렸다.
 
집에 돌아오니 당연한 듯 J는 없었다. 아마도 그 2주라는 것은 오늘부터 시작인듯 했다.
 
 그렇게 2주가 지나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니 또 당연한듯 J는 집에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듯 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른손의 검지손가락 한 마디가 없어져 있었다. B는 거기에 대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왠지 자신이 그렇게 만든 것 같은 죄책감이 일어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렇지만 B는 거기에 개의치 않은 듯 오히려 더 명랑해져 있었다.
 J는 겉으론 변하지 않은 듯 했지만 내부는 상당히 변한 듯 보였다. 그날 이후 J는 쇼핑을 나가지도, 돈을 훔치지도 않았다. 무언가를 구입하더라도 꼭 생활에 필요한 물건만을 구입하였다. 그런 J를 보자 B는 만족하면서도 무언가 허전하고 불안정한 느낌을 매일 받았다.
 도대체 그 2주일 동안 무슨 일이 있던 것일까?
 
 그렇게 3개월 뒤에 B는 J에게 검지손가락과 함께 무엇인가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그와 함께 자신의 내부에서도 무엇인가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곧 B와 J는 이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