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첩속 거짓말

헤세의 구멍

야가다 2020. 4. 24. 20:54

 내가 스스로 자신안에 구멍이 있다고 느낀 것은 꽤 오래전의 일이었다. 사실 그러한 구멍을 느끼기 이전에도 그 구멍은 예전부터 존재했고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라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그 구멍 또한 다른 여타 구멍과 마찬가지로 세월이 지나면 저절로 메워져 가려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구멍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커지더니 마침내는 내 본질이 그 구멍이 아닐까하는 착각마저 들게 하였다.
 난 그 구멍을 누군가가 메워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도무지 내 안에선 내 안의 구멍을 메울수 있는 무언가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몇몇의 여자와 사귀며 그 구멍을 보여주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진지한 상담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내 그런 구멍을 보여줄 때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에게 실망을 하며 떠나갔도 또 비슷한 수의 사람들은 아직 내가 덜 취했다며 술을 잔뜩 먹이곤 했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나는 사람이 떠나는 만큼이나 술을 마시는 것도 괴로운 일이라 곧 그 구멍에 대해 누구에게도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닌게 아니듯이 구멍은 언제나 탐욕스럽게 날 야금야금 잡아먹고 있었고 언젠가는 난 그 구멍에 빠져 죽게 될 것이다.
 
 한 때는 이런 시시한 고민을 한 적도 있었다. 도너츠의 구멍에 관하여, 도너츠의 구멍은 구멍으로써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빈 공간인지.
 지금도 어느쪽에도 쉽게 손을 들 순 없지만 내 안의 구멍에 빠져 죽을 운명이라면 어느쪽이든 크게 상관은 없을 것이다.
 
 어찌보면 자신안의 구멍에 자신이 빠져죽는 다는 것도 우스울지 모른다. 자신이 F(x)이고 구멍을 f(x)라고 한다면 -적어도 내가 아는 범위에선- 절대로 f(x)는 F(x)보다 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세상엔 아직 내가 모르는 것도 많기 때문에 절대 나는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결국 이는 내게 꽤 심각한 문제였다. 난 아직 20대이고 결혼도 하지 못했으며 하고 싶은 일들도 많았고 계획하고 실행하지 못한 일들도 상당히 쌓여있었다. 난 정말 간절하게 죽기 싫었다. 아니 언젠가는 죽고 싶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런 방법으로는 죽기 싫었다.
 결국 난 죽지 않기 위해 날 빠뜨리려 득의양양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그 구멍에게 어떠한 방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뚜껑을 씌운다던가 아니면 무엇으로 메꾼다던가, 최소한의 표지라도.
 그렇지만 난 그 구멍의 위치를 정확히 몰랐고 그러므로 어떠한 표식도 가릴만한 뚜껑도 메울 무언가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다가 옆 창밖을 바라보면 가끔 지금이 아침인지 저녁인지 구분할 수 없을 때가 있다.
 
 "누구나 어렸을 때 한번쯤은 헤세에 빠지곤 하지."
 이건 내가 고등학교 때 문학을 가르치던 선생이 내게 한 말이다. 지금이야 그 때 읽었던 책의 내용이든 뭐든 제목외에는 기억이 전혀 나질 않지만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를 읽고 있던 나는 그 선생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곧 헤세를 읽는 것을 그만 뒀는데 무엇 때문인지 그 후론 어떠한 헤세의 책의 내용도 기억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지만 책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도 저 선생의 저 말만은 마치 내게 문신인 듯 전혀 지워지질 않는다.
그리고 그말은 곧 다른말로 변환되어 내 주위를 멤돈다.
 '넌 언젠가 헤세에 빠지고 말거야.'라고.
 
 물론 헤세가 내 구멍의 본질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또한 헤세를 읽는다고 해서 내가 죽을 거라는 생각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난 헤세를 읽지 않는다. 그 구멍도 여전히 존재한다.
 실제로 난 내 안의 구멍에 빠져 죽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실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것보다는 어느날 교통사고로 죽는다든지 지하철이 전복되거나 승강장에서 떨어져 죽을 확률이 아마 몇만배 정도는 더 높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따라다니는 저주와 구멍은 날 언제나 불안정하게 만들 거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 불안정이 날 죽음에 몰아 넣는다고 한다면 결국은 그것 때문에 죽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게 아닐까.
 
 
 결국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