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비록 고등어를 먹진 않았지만 고등어가 머리부터 내 입에서 뛰쳐 나올 것만 같았다. 예전부터 그랬다. 내가 긴장하거나 기분이 안좋을 때면 항상 뱃속에 무언가 생선이 난동을 피운다는 느낌을 가지곤 했었다. 항상 그 생선이 내 뱃속을 항문부터 장을 거슬러 거꾸로 타고 올라 입으로 나오려 한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데, 그 생선이 고등어라는 이미지를 가진 건 최근의 일이다.
지난 추석에 본가에 들어가 차례를 지내기 위해 장을 보러 간 사이에 어물전에서 전을 하기 위한 대구를 고르다가 본 그 생선 때문이었다.
사실 난 고등어를 먹어 본 적이 없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어머니는 내게 종종 고등어에 알러지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내가 기억이 없을 무렵에 큰 일을 치루고는 우리집은 그 후로 고등어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모르지만, 내 기억에 고등어란 생선을 먹어본 적이 없는 건 사실이다.
아무튼 매끈하고 탄력있는 거대한 몸뚱이와 아직도 힘이 넘치는 듯하며 방금 전까지도 힘차게 좌우로 흔들었을것만 같은 꼬리, 대양을 가르던 그 미끈한 유선형 몸은 내 몸은 바다가 아니지만, 내 몸속에서 이런 난동을 피우는 생선이라면 당연히 저런 고등어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런 상상을 한다고 해도 실제로 고등어가 내 입밖으로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자독하게 냄새나는 노란 위액 덩어리만 나오겠지. 그 노란 액체 덩어리 어디에도 고등어의 흔적은 아마 없을 것이다.
2000년 초반은 대강 이랬다. 매일 술을 마시고 담배를 태우고 포르노를 보고 고스톱을 쳤다. 그마저도 지겨워지면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정 그래도 시간이 남을땐 오락실을 가서 꼬마 아이들과 시시껄렁한 대결 같은 걸 했다. 기대하던 1999년 종말은 오지 않았고, 난 입시에 실패했으며 무엇을 위하지도 않았고 그럴 대상조차 없던 것이다. 그저그저 하루하루 장례가마에서 저승 노잣돈을 한장한장 태우는 것처럼 내 인생을 그렇게 하나하나 소각해 갈 뿐이었다.
처음 술을 마시고 걸으려 했을 땐 걷기조차 힘들었으나 나중엔 그 또한 재미가 있었다. 아니 오히려 어떤 면에선 더욱 세상을 리얼하게 느낄 수 있었다. 세상은 나와 관계없이 한날은 오른쪽으로 또 다른 한날은 왼쪽으로 마음대로 돌았고 나 또한 그 회전에 맞춰 돌려 했지만 그 축과 나의 축이 다름을 누가 말해주지 않더라도 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술을 깨고 나면 그 축은 도무지 보이지 않았으며 그 축을 정면으로 바라보기 위해선 항상 술을 마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술을 마시고 나선 항상 그 축과 나를 동일시 해보기 위해 스스로 팔을 벌리고 눈이 덜녹아 얼음이 얼어있는 길가에서 뱅글뱅글 스스로 돌아보곤 했었다. 그리고 그 축은 항상 나와는 관계없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어 또 다시 정신을 잃을 때까지 더욱 술을 마시곤 했다.
그렇지만 고등학교 졸업하는 마지막 날까지 술을 마실 수는 없었다.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될 지 모르지만 12년간 학창 생활의 마지막이고 또 부모님이나 아는 사람, 고등학교시절 만난 놈들에게 술 취해서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졸업식 전 날엔 술을 마시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이건 확실하다. 아니 사실 조금 마셨을지도 모르겠다. 기억이란 건 누구나 알다시피 어쨋든 부정확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가지 확실했던건 자다가 얼핏 잠에서 일어나 거울에서 본 내 모습이 처참했다는 사실이다.
얼굴은 한눈에 알아볼수 있을정도로 회색빛이었고, 머리는 전날에 바른 젤이 멋대로 헝클어져 지옥에서 온 듯한 풍경이었고 눈은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는 듯 했다.
난 억지로나마 마지막 학창시절의 날 답게 최대한 정숙하게 보이려 노력했다. 오랜만에 면도도 하고 머리를 감고 빗질도 했으며 작년 친구 어머니 장례식 때 입고 방치해뒀던 예복도 꺼내 입었다.
접혀진 구두 뒷굽도 깨끗이 펴고 흙눈도 닦은 다음 집밖으로 나와 시계를 보니 새벽 6시였다. 졸업식은 9시에 시작됐지만 집에 다시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
아마 1월이라서 그랬는지 눈이 많이와 도로든 길이든 길가엔 녹지 않은 눈으로 하얗게 되어 있던 걸로 기억한다. 한걸음 한걸음마다 어기적 조금 비틀거렸지만 미끄러지는 기분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해뜨기전 어스름히 어둠속에 푸르스름한 거리에 주홍빛 가로등 사이에서 그 빛에 반사되는 귤 껍질같이 맨들거리며 역시 주홍빛을 띄는 눈을 예복을 입고 걷고 있노라면 종종 다시 맥주가 마시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들어간 편의점은 아직 새벽이라 그런지 조용하고 한산했다. 라디오는 무언가 계속 똑같은 음악을 내보냈고 왠지 사람을 피곤하게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편의점의 여종업원은 손님인 나에게도 음악에도 관심이 없다는 듯 유리벽 쪽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무언가 모를 잡지를 보고 있었고 가끔 때때로 감기에 걸렸는가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아마 일은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적당히 둘러 본 편의점은 역시 동네에 있어서 그런가 그다지 큰 크기는 아니었다. 아마 어른 몇명이 들어오면 가득차 보일 그런 크기였다. 번화가가 아니라 동네 주민을 상대하는 크기의 점포이기 때문에 그렇게 커다란 매장이 필요하진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매장을 다 둘러보는데는 30여초면 충분했다. 그 30여초 동안 봐둔 것으로 난 매장의 왠만한 물건이 어딨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었고 또 매장 간이 시식대에 라면을 먹는 노숙자 같은 아저씨가 바닥에 라면 국물을 몇방울 흘렸는지조차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흥얼거리는 음악에 밝은 실내 조명을 받다보니 방금 전 내가 과연 어두운 새벽녘 밖에 있었는가하는 의구심도 약간 들었다. 지나치게 밝은 조명은 내게 낮과 밤의 경계가 불분명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왠지 흐릿해지는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해 유리문 밖을 바라보면 그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만이 그곳에 있었다. 사실 어둠이 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어쩌면 아무것도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곳은 이곳 뿐이고, 난 이 곳에서 구원을 받을지도 모른다라는 생각.
물론 투명한 유리로 된 문을 밀고 한 발자욱만 나가면 다시 괴로운 졸업식장에 가야만 했지만, 이 형광등 아래에 있는 동안은 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 신이여!!! 태초에 빛이 있었나니!!
기분이 좋아진 나는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노래를 따라부르기 시작했다. 처음에 들어왔을때 피곤하게 느껴지던 노래는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과연 이게 그 노래인지 이젠 뭐 별로 상관없었다. 평소에 잘 듣지 않는 노래라 가사는 몰랐고 아무렇게나 대충 멜로디에 끼워 맞춰불렀지만 그것 나름대로 흥이 있었다.
" 부어라, 마셔라, 난 취하련다.
메탄올이든, 에탄올이든 상관이 있을까?
오늘은 중요한 날,
형수와 잠을 자는 날
형수님 어때요. 닳는 것도 아닌데.
빌어먹을. 형님께 비밀은 지킬테니까."
노래를 부르자 다시 술생각이 나서 도저히 견딜수가 없었다. 그래 딱 맥주 한캔만 마시는 거야. 기분 같아선 그 매장에 전 술들을 다 마실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좀 있으면 졸업식에 참석해야 하니까 딱 한잔으로 만족하는 거야. 난 진열대 냉장고에 맥주들을 바라보면서 맛을 떠올리다가 내가 아는 맥주 중에 가장 텁텁하고 독하며, 다음날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던 그 맥주를 골랐다.
난 말없이 계산대 위에 맥주를 올려놓았지만, 그 점원은 별로 관심 없다는 듯이 자신이 보던 잡지만을 계속 볼 뿐이었다. 난 그 점원의 주위를 환기시키기 위해 발소리를 내보고 약간의 인기척을 내 보았지만 점원은 별로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책을 볼 뿐이었다.
그러나 뭐 어떠랴. 적어도 여기선 신의 은총이 나와 함께 하는데.
난 계산대에 노크를 두번하고 그 점원을 소리내어 불렀다.
"저기요. 계산해 주세요. 이거."
비스듬히 앉아 책을 보던 점원은 그제서야 귀찮다는 눈빛으로 나를 겨우 올려다 볼 뿐 그다지 자신의 일에 충실할 듯한 마음은 없어보였다. 그 점원은 나를 조금 바라보더니 다시 자신의 책을 보는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난 조금 기분이 상했지만 저 여자는 밤새 편의점에서 저렇게 잠도 안자고 있었던 게 아닌가? 아마 잠을 못 자 피곤해서 저랬을 것이다. 난 조금 더 인내심을 갖고 그녀에게 손님인 내게 관심을 갖기를 요구했다.
"이거 계산 안해주세요?"
전보다 약간 높아진 목소리와 살짝 기분이 상한듯한 말투로 말을 걸자 그 점원은 할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이 보던 책인지 잡지인지를 덮고 그렇지만 예전에 비스듬히 앉은 자세로 나를 조금 더 바라보았다.
말없이 한 시계초침이 두세번 정도 울릴정도로 나를 바라보더니 그 자세 그대로 내게 말을 했다.
"신분증 보여줘요."
물론 비록 오늘 졸업하지만, 고등학생인 난 미성년자이므로 술을 살 수 있는 신분증 따위가 있을리 없었다. 그렇지만 난 저 맥주를 꼭 먹고만 싶었다. 저 맥주는 신이 정해 준 맥주가 아닌가? 평소에 신은 날 싫어했지만, 이번 기회로 좀 친해질 수 있을지도 모르잖은가.
난 주머니를 뒤지는 척하며 짐짓 신분증을 가져오지 않은 연기를 했다.
"아 깜빡 잊고 신분증이 들어있는 지갑을 두고 왔네."
그 점원은 나를 조금 더 보고는 다시 읽던 잡지를 집어들었다.
"신분증이 없으면 술을 팔 수 없어요."
그렇지만 신분증이 없다고 꼭 술을 못사는 것은 아니었다.
"저기요. 저 미성년자 아니라니까요. 제 얼굴을 한 번 보세요. 제 얼굴이 미성년자 같아요? 이렇게 평일인 수요일에 미성년자라면 새벽 6시에 일어나 정장을 차려입고 맥주를 사러 다니진 않을 꺼라구요. 그러지 말고 다음에 신분증 가져올테니 한번만 파세요."
"어쩔 수 없어요. 신분증은 없는거죠? 안되는 건 안되는 거에요."
그 점원은 이제 더 이상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투였다.
"그럼 좋아요. 신분증이 없으니 대신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적어둘께요. 만약에 번호가 틀리다면 팔지 않아도 좋아요. 그럼 됐죠?"
나 카운터 옆에 쓰레기통처럼 생긴 양철통에 담긴 냅킨 - 어떻게 저런 통에 담긴 냅킨으로 뭘 닦으라는거지? - 을 하나 집어 펜으로 주민등록번호를 적으려 했다. 물론 그 번호는 엉터리였다. 단지 이 아르바이트 직원이라면 확인을 안할 것 같기 때문에 아마 적어준다고 해도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이 쓰레기 같은 냅킨이 문제였다. 그 편의점 로고가 가운데에 선명하게 적혀있던 그 냅킨은 무엇보다도 뻣뻣하고 거칠며 잘 찟어지고 툭하면 구멍이 뚫리곤 했다. 덕분에 난 한 글자 한 글자 적을 때마다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고 가짜 주민등록번호를 다 적었을 때 쯤엔 그 냅킨은 내가 보더라도 글씨를 알아볼 수 없을 것만 같은 흉물스런 모습이었다.
난 그 이름과 주민등록번호가 적혀있는 냅킨을 그 점원에게 건네주었다.
"자 됐죠?"
그 점원은 이내 표정을 찡그리더니 그 냅킨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여점원의 표정은 이걸 과연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조금 난감한 표정이었다.
"좋아요. 일단 안에 들어가서 확인해 볼게요. 대신 확인이 끝날 때까지 맥주를 살 수 없다는 건 여전한 거니까 계산하고 갈 생각은 하지 말아요."
그 점원은 몸을 숙여 카운터 뒷쪽에 있는 작은 쪽문을 열고 '해철씨 나와봐요'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곤 그 여점원이 그 냅킨을 챙기고 있는 사이 그 작은 쪽문으로 곰처럼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기어나왔다.
"...으아아하아암...불렀어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그 남자는 무언가 검은 얼룩이 잔뜩 뭍은 유니폼을 입고 세상이 끝나도 좋으니 30분만 더 잤으면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니폼에 뭍은 검은 얼룩 사이에 있는 원래의 줄무늬가 오히려 원래의 것이 아닌듯 보였다. 곱게 드라이질과 함께 단정하게 빗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머리는 한껏 헝클어져 있었으며 얼굴은 누가 보더라도 푸석푸석해 보였다. 벌건 눈은 차마 제대로 뜨지조차 못했다.
그 여자 점원은 밖으로 나온 남자의 그런 모습은 별로 대수로운 것 같지 않은 듯 했다.
"카운터 좀 보고 있어요. 저번처럼 또 자면 안돼요. 제대로 보고 있어야 해요?"
"...예..."
그리곤 그 여점원은 방금 남자 점원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 구멍으로 들어가버렸다. 어이쿠 저런 상태를 보고도 들어갈 마음이 생기나?
그러나 그런 여직원의 말에 대답한 것과는 다르게 그 남자점원은 아까 그 여점원과 마찬가지로 카운터 뒷쪽에 있던 의자에 걸터 앉더니 눈을 감고 이내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기 시작했다.
그 카운터 앞에서 난 무척 당황스러웠다. 물론 손님은 나 외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 남자직원의 입장에서는 걱정이 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반대로 나를 어떻게 믿고 저렇게 잠드는 건가라는 의문도 들었다. 그냥 맥주를 들고 가 버릴까라는 생각도 잠깐 해 보았으나 그러고 싶진 않았다. 예전부터 난 정당한 댓가를 치루지 않은 물건이나 성과에 대해선 항상 무언가 안좋은 결과가 뒤따르곤 했던 것이다.
가령 시험 시간에 커닝을 하더라도 유독 오답을 적는 일이 많았으며, 스스로 푸는 것보다 오히려 성적이 안 좋을 때도 많았다.
난 이렇게 된 이 상 그 여점원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 여점원은 내가 적은 알아보기조차 힘든 주민번호를 확인해 보지 않을 것이다라는 확신이 있었다. 만약 확인을 하려 했다면 보다 정확한 글씨로 써 주기를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다림을 상당히 괴롭게 만든 것은 그 남자직원의 어처구니 없는 코골이였다. 난 도저히 그 코골이만은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어릴적 살던 2층집의 아래엔 정확히 추정이 안될 정도로 나이를 많이 먹은 노인이 있었는데, 그 노인은 나이도 70이 넘어 - 70을 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내게 나이가 많다라는 것은 최소 70을 넘었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매번 밥도 제대로 못먹고 골골 대던 주제에 코골이만큼은 윗집에 살고 있는 나에게도 들릴만큼 우렁찼다.
내게 있어서 코골이란 것은 그 다 죽어가던 늙은 할배의 골골거리는 목소리에서 묘하게 나던 죽음의 냄새처럼 상당히 끈적하고 피곤하며 나른하고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처음에 난 그 코골이 소리를 잊기위해 그 코골이 소리에 맞춰 덜커덕 거리던 기차를 떠올렸다. 규칙적으로 울리는 철커덕 소리와 묘하게 전기을 떨리게 하던 열차의 진동, 그리고 옆 라지에이터에서 나오던 온화한 열기.
생각해보니 내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기차여행은 10살무렵에 남원에 기차를 타고 갔을 때다. 당시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잘 모르지만 지금과 같은 한 겨울에 남원에 기차를 타고 어머니와 단 둘이 간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지독히도 느린 통일호를 타고 초저녁쯤에 출발한 열차는 온 세상이 다 검어지고 모두 잠이들고 나서야 도착했던 기억이 난다.
통일호의 오래 앉아있기에 불편했던 녹색시트 의자와 덜컹거리며 무척 느렸던 열차의 속도는 어린 소년의 기차에 관한 모든 환상을 부숴버리기 충분했지만, 남원역에서의 풍경은 그 모든 것을 보상하고도 남을 무엇이 있었다.
도착했을 당시엔 컴컴한 밤이라 풍경이 아름답다거나 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컴컴해 아무것도 알아볼 수는 없었으니까 그 반대였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아직도 기억나는 건 세상을 이미 도너쓰를 덮은 슈가파우더처럼 새하얗게 쌓인 눈과 너무 어두워 눈의 은빛같은 달빛에 반사돼 어스름하게 무언가 저 너머에 신비로운 것이 있을 것만 같은 철길 너머는 세상의 끝까지 이어져 있을 것만 같았고 초라하지만 백색 형광등 밝은 불이 새어나오며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진 남원역사는 주변의 오렌지 빛의 등이 그 앞을 비춰 마치 누군가 그 안에 많은 사연을 가진 누군가가 우리를 초대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풍경 아닌 풍경에 무언가 알 수 없는 성스러움과 신묘함을 느낀 것은 아마 나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 남원 역에서 내린 것은 나와 어머니 말고도 또 다른 부부로 보이는 두꺼운 코트를 껴입은 남녀가 있었는데, 그들도 이런 풍경에 무언가 감화 내지는 감동을 받은 듯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고는 내 어머니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들은 흰눈이 쌓였던 역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선, 우리에게도 집으로 사진을 보내준다고 하고선 어머니와 나의 사진도 역시 찍어갔다. 어머니는 그 남녀에게 우리 집의 주소를 적어줬지만 아쉽게도 그 사진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질 않았다. 난 그 신비함이 있었던 역사와 밤의 풍경이 마음에 들었는데 말이다. 필시 그들 부부에게 필치 못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 카메라를 잃어버렸다든지 말이다. 왜냐하면 그런 풍경을 본 사람들이 거짓말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던 그 사진처럼 그 남자의 코골이는 멈추지 않았고 주민등록번호를 확인한다며 안에 들어간 여직원도 나오질 않았다. 오히려 코골이는 멈추기는 커녕 더욱 소리는 커지고 규칙적으로 변해, 가만히 듣다보면 이 세계는 그 남자의 코골이와 그 코골이를 위한 숨쉬기만이 존재하는 듯 했다. 그리고 그 코골이는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으며 주변의 모든 것들 심지어 나 조차도 집어 삼킬 기세였다. 난 그 코골이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아니 좀처럼 나오지 않는 그 여점원을 부르기 위해서라도 그 남자 점원을 깨우기로 마음 먹었다.
"험,험. 저기요?"
난 헛기침을 하며 그 남자를 불러봤으나 그 점원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저 꿋꿋하게 코를 골 뿐이었다. 마치 가만히 보고 있으면 가게에서 코를 고는 것이 그가 할 일인 것처럼 보였다.
"이봐요. 아저씨, 잠깐 일어나 보세요."
난 카운터에서 한 손을 테이블에 받히고 잔뜩 몸을 숙여 그를 조금 흔들어봤음에도 그는 미동조차 없었다.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주인이 저런 점원을 뽑아 가게를 맡긴 것일까?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가게 주인은 어쩌면 저 남자의 코고는 능력을 중요시 여겨 저 남자를 고용했는지도 모른다.
'자네 할 줄 아는 것이 뭔가?'
'네.무엇보다도 코 고는 것은 자신있습니다.' 이렇게.
어렸을 때 우리집에서 가장 코를 잘 골았던 것은 역시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마치 그 코를 고는 것으로 가족의 지배력을 갖고 있다고 믿는 듯이 휴일 거실에서 낮잠을 자며 울려퍼지는 코골이 소리는 온 집안 구석구석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문을 닫아도 음악을 크게 틀어도 심지어 헤드폰을 끼어도 그 코골이 소리는 사라지지 않았고 내게 있어서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넌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만을 어깨에 안겨주었다.
난 어렸을 때 그럴때면 몰래 거실에 자고 있는 아버지에게 다가가 아버지의 고개를 돌려놓거나 얼굴에 흰 수건과 같은 천을 몰래 덮어놓곤 했었다. 그럴때면 종종 그 코골이가 멎는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코골이가 멈추지 않더라도 자는 얼굴에 마치 죽은 사람에게 씌우는 마냥 흰천이 덮어져 있다면 왠지 안심이 되었다. 그 흰천이 덮어져 있는 동안엔 난 자유로웠고 그 지배에서도 벗어난 기분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그 점원의 얼굴에 흰천을 덮는다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중요한 것은 흰 천과 비슷한 무엇도 이 편의점 안에는 없다는 것이다.
난 아쉬운대로 카운터 옆의 냅킨을 한장 집어 넓게 펼쳐보았으나 이것으로는 흰천을 대신하기엔 좀 역부족인 듯 싶었다. 그러나 저 점원의 코골이를 그대로 둘 수 만은 없던 것이다. 그를 깨우지 못한다면 그의 코골이라도 멈추게 하는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냅킨을 곱게 카운터에서 차곡차곡 곱게 펼쳐 쌓아갔다. 어릴 때의 그 흰천과 같은 효과를 내려면 아마 어느정도 이상의 두께가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차곡차곡 여러장의 냅킨을 곱게 펴고 있으려니까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난 원래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 졸업식에 가려는 도중이었고 겨우 맥주를 한 캔정도 사려고 했을 뿐이데 이런 점원을 하나 깨우기 위해, 아니 겨우 코골이를 막기 위해 냅킨을 펴고 있다니, 과연 나는 어디에서 뭘하고 있는가 보다는 어디에서 뭘 하고 있어야 했나라는 생각이 우선 들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인생이란 원래 그런것이니까. 내가 여기서 이렇게 냅킨을 십수장이나 곱게 펴서 포개고 있는 것도 다 원인이 있기 때문이겠지.
그렇지만 그런 내 노력도 의미없게 그 남자 점원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더니 있는 힘껏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 버렸다.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하품과 입맛을 다시는 일이었고, 다음으로 내뱉은 첫 마디는 나에게 '무슨 일이시죠?'라는 말이었다.
이런. 보통 편의점에서 카운터에 계산원이 있고 그 건너편에 사람이 있다면 대충 두가지일 것이다. 점원을 위협해서 강도짓을 하거나 아니면 손님이거나. 그런데 나에겐 그를 위협할 만한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다. 심지어 맨몸으로 덤빈다면 그에게 십수초내에 묵사발이 될 것이 뻔했다. 그렇다면 손님일 것이 뻔한 것이지만 그에게는 그런 것을 알아채는 감각이 없는 듯 했다.
그 점원의 말투를 미루어보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던 생각은 대체적으로 이런 것 같았다.
그는 이 편의점이라는 영역의 지배자이고 나는 그 영역을 침법한 것. 사실 그 말도 엄격한 의미에서 본다면 틀린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이 편의점이 그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관리하고 있는 편의점이라는 점은 사실이었고 나는 그 영역을 침범한 손님이니까.
난 곱게 펴던 냅킨을 대충 아무렇게나 접어 주머니에 넣고선 그에게 물었다.
" 저 아까 안에 들어가신 여자분 있잖아요. 들어간지 30분이 넘었는데 아직까지 안나오고 있거든요. 좀 불러주실 수 있나요?"
그 남자점원의 눈에는 여전히 피곤함이 남아있었지만, 한숨 자고 난 탓인지 적어도 표정은 처음 봣을 때보다 상쾌해보였다.
"누구 말씀이시죠?"
"아... 아까 저기로 들어가신 분 있잖아요."
난 손으로 카운터 뒤의 문인지 구멍인지를 가리켰다.
""네? 저기?.... 아 윤미씨 말하시는 거구나?"
그 여점원의 이름은 윤미인 것 같았다.
"예.. 아마 그분이요. 안에 들어가신지 30분이 넘었는데 안나오셔서요."
"안나오는게 당연하죠."
"예?"
"그 분 퇴근하셨으니까요."
난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그럼 내가 30분이나 여기서 죽치고 있던 것은 대체 뭐란 말인가?
"퇴근했다구요?"
"당연하죠. 그 분 근무시간도 끝난는데요 뭐. 윤미씨 친구분이세요?"
"아.....네...뭐."
난 대충 둘러댔다.
"근데 말도 안하고 그냥 가버렸나보네. 뭐 급한 일이 있었나?"
그 남자점원은 좀 전보다 경계가 풀린듯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도 그런 일은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과 동시에 그 직원을 책망하는 듯한 눈빛을 보였다.
"뭐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죠. 다음에 올게요."
난 맥주를 사기 위해 같은 실랑이를 두번이상 하긴 싫었다.
"네, 그러세요. 근데 이 맥주 사신거 아니였나요? 놓고가시면 안되죠. 가져가세요."
난 엉겹결에 그 맥주에 대한 값을 치루지도 못하고 맥주를 들고 거리로 나와버리고 말았다. 거리는 여전히 바람이 불었고 어두웠으며 얼음길은 여전히 녹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