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비록 신년이 되었지만 상황은 그다지 나아지거나 좋아지지 않는다. 여전히 난 집에서 하루종일 누워 기약없는 전화만 바라보고 있었고 인내심을 갖던 주변의 시선도 매번 점점 안좋아져 갔다. 주위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하여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주변의 기대가 커져갈수록 나의 실패는 더더욱 크게 내 정수리 위로 떨어진다. 실패가 크게 나를 짓누를수록 나는 더욱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루종일 방에 누워있다. 낮에는 해를 보고 싶지 않았다. 두꺼운 암막커튼을 치고, 어두컴컴한 방에 눅눅한 이불을 끌어안고 누워있었다. 한낮의 해는 나를 질책하듯이 빛을 내리 쬐었다. 난 해가 하는 질책이 싫었다. 모두가 일하는 그 시간, 일하는 자들에게 해는 축복이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할 게 없는 자에게 해는 고문이었다. 그렇게 숨어지내다 해가 떨어지면 바퀴벌레처럼 밖을 나와 돌아다녔다. 나는 한낮의 해가 비추는 부끄러운 열기가 없는 한밤이 무엇보다 좋았다. 해가 사라지면 질책하는 존재도 사라지는 것 같아, 자유로운 해방감을 느꼈다. 해가 유난이 밝았던 날은 해방감도 그만큼 커서,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것이다. 밤이되면 술을 마시고 취해 비틀거려도 아무도 뭐라하지 않았고 골목 차가 주차돼 있는 빈 곳에 시원하게 오줌을 갈기더라도 용서가 되는 듯 했다. 밤이란 나 같은 잉여의 인간도 모두 받아주는 자애로운 부처와 같은 것이다.
그렇다. 난 밤을 사랑했다. 하루 24시간 중 밤이라는 게 겨우 절반 밖에 차지하지 않는다는 것이 몹시 한스럽고 못마땅하기만 했다. 정말 신이 만인을 사랑한다면 모두가 받아들여질 수 있는 밤을 낮보다 길게 만들었을 것이다. 사실 긴 것으로는 모자란다. 하루가 다 밤이 였으면 좋았을텐데 말이다.
그러나 신은 날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 신은 내 편인 적이 없었다. - 낮을 만들었고 난 그 낮동안에 숨어 지내야만 했다. 왜 숨어지내냐고 물어본다면 딱히 할말은 없었다. 그저 나는 내 스스로 낮의 세상에 내놓기 부끄러운 피조물이었으며, 낮은 나를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하지만 낮의 해에게서 도망 칠 수 있는 방법은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태양을 피하는 방법따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그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곤 태양을 애써 무시하거나 그저 외면하는 것 뿐이다.
그리곤 바퀴처럼 낮의 인간들이 모두 잠들면 그제서야 작은 구멍을 기어나와 마치 모두 제것인양 활보하는 것 뿐이다.
내가 예전에 만나던 여자는 전형적인 낮의 사람으로써 내가 이런 밤의 생활을 하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땅딸만한 키에 유아적인 체형을 가졌던 그녀는 성실하고 차분하며 머리가 좋았다. 단지 얼굴에 주근깨가 많았을 뿐,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다니던 그녀는 항상 내게 쓸데없는 관심이 많았으며 내게 무언가 용기를 주려 노력했다.
가령 이런 것이다.
"너에겐 재능이 있고, 누구보다 잘 될 수 있어." 란 말.
그녀는 내게 거의 무한한 인내심을 가진 듯 했으며 나도 사실 그녀가 좋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난 그녀를 마모시키는 존재일 뿐이었고 그녀가 지쳐 떨어져 나갈 것이라 생각하고 그녀가 완전히 마모되어 떨어져나가길 기다렸지만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결국 난 그녀에게 심한 욕설을 하고 다신 연락하지 않는 것으로 그녀와의 관계를 정리했었다. 그 때 일을 당연하게도 후회하지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아마 그녀는 그것으로 구원을 얻었으리라.
아마 지금의 꼬라지를 과거의 그녀가 본다면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 한편으론 매우 궁금하기도 한다. 어쩌면 비웃음을 사거나 자신에게 욕설을 한 댓가라며 고소해 할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면 그런 조소를 받아도 싼 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솔직히 그녀가 그랬을 것이라곤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마 예전의 그녀라면 호동을 만난 평강처럼 다시 무한한 인내를 갖고 나를 봐 줄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은 절대적인 내 희망일 뿐이지만 그랬을 것이다. 아마
사실 지금이야 이렇게 비교적 담담하게 이야기를 끌어나가지만 그녀와 헤어진다는 것이 나에게도 또한 매우 큰 충격이었음을 부인하고 싶진 않다. 내 인생을 음지에서 양지로 이끌어 주던 그녀를 잃자 난 더더욱 음지로 파고 들었고 명치에서 손가락 두마디 정도 왼쪽 위엔 무언가 막힌듯한 묵직함을 매일 느껴왔으며 가끔 누군가 그 부위를 큰 창으로 꽂아주었으면 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처음엔 그 괴로움을 없애보려고 많은 시도를 했었다. 게임을 하기도 하고 왁자지껄하게 술도 마셔봤으며 운동을 해봤지만 그 어떤 것도 소용이 없음을 알게 된 후부터 그저 그 답답함은 내 생활이 되었다. 지금은 그녀의 외모나 목소리 말투도 거의 생각이 나지 않지만 그 가슴의 죄임은 전혀 없어지지도 약해지지도 않았다.
내 친구들에게도 사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한 적 없었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 언제나 누군가 결혼했다는 이야기 혹은 죽었다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정치, 사회 그리고 여자에 관련된 이야기로 마무리 지어졌다. 사실 그 누구나 이런 가슴에 뭉친 것은 하나씩 갖고 있었지만 이것에 대해 서로 이야기 하는 것은 마치 금기와 같았다. 만약 누군가 이런 암묵적 금기를 어기고 그런 이야기를 꺼낸다면 당사자는 몹시 당황해하며 주위 다른 놈들은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느라 어색해지기 일쑤였다.
나 역시도 친구들에게 이런 문제는 꺼내지도 물어보지도 않았지만 의외로 이런 문제를 털어놓은 것은 전혀 모르는 낯선 여자에게서 였다.
개같이 취한 상태라서 어떻게 그녀와 만나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기억나는 것은 친구와 단 둘이 취한 상태에서 다른 테이블에 말도 안되는 말로 합석을 요구한 것 뿐이다.
"그쪽도 여자 둘이세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합석이나 하시죠?"
이런 어이 없는 말에 그 일행중 갈색 머리를 뒤로 묶고 야구모자를 눌러쓴 여자는
"저흰 불교 안믿어요."
라고 답했다.
난 취한상태였지만 저 대답이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불교 안믿어요...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