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나
"칸나 알아?"
"칸나?"
소녀는 칸나라는 이름을 잠깐 떠올려 보았다.
다른 여자 이름인가?
소녀가 아는 칸나라는 정보는 극히 적었다. 적었기 때문에 정확했다.
예전에 쓰던 학용품의 브랜드, 혹은 예전 보던 공포영화의 한 에피소드 제목중 하나였다. 그 공포영화는 꽤나 끔찍했던 것으로 희생자 이름이 칸나였는데 귀신에게 턱이 떨어져 나가는 뭐 그런 고어물이었다.
때문에 별로 그다지 기분이 좋진 않았다.
"꽃이야. 칸나는."
"그런데?"
소년은 무표정하게 소녀를 한번 바라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예전일이었어. 내가 살던 곳은 여름에 무척이나 더운 곳이었어. 더구나 우리 부모님은 농사를 지었거든. 때문에 난 걸어서 3키로 정도 되는 길을 마을 한 가운데를 지나는 국도를 따라 쭈욱 걸어야만 했지. 그때도 무척 더운 날이었어. 하지만 그날도 역시 아버지를 도와야만 했지. 내가 어릴 때라 큰 일을 돕진 않았지만 아무리 힘도 없고 일도 못하는 어린애라도 의미가 있는 법이거든"
"그래서?"
"그날도 역시 아버지께서 일하는 밭으로 국도를 따라서 가고 있었어. 날은 덥고 땀은 내 셔츠를 완전히 적셔 버렸지. 또 그 나이때에는 걷는다는 것은 꽤나 괴로운 일이었다구. 피부도 따끔했고. 하지만 갈수 밖에 없었어. 그런데 온통 지겨운 초록빛의 산 밑자락에 무슨 빨간색 점이 보이는 거야."
"아하 그래서 그게 칸나라는 거야?"
소년은 고개를 잠깐 끄덕였다.
"그래. 말대로 칸나였어. 길게 쭉 뻗은 줄기에 탐스런 꽃봉오리. 칸나는 활짝피지 않는 꽃이야. 또 활짝피지는 않지만 꽤 커다란 꽃이고 상큼하고 아름답지. 잎싸귀도 손바닥보다 커. 난 점점 칸나에게 다가갈수록 행복해졌어. 정말 그건 그 어떠한 노래보다도 아름답고 강렬했으니까. 또 그만큼 순수하고 정렬적이기도 했어."
"그래서?"
소녀는 칸나 이야기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난 그때의 칸나를 잊을수 없어. 그래. 난 그때부터 칸나를 좋아했던 거야. 쭈욱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먼곳을 바라보던 소년의 시선이 잠시 한곳에 머무르는 듯 했다. 하지만 오래진 않았다.
"그 한 여름의 칸나만큼 널 좋아해."
그리곤 소년은 그 소녀를 안았다.
그리곤 잠시 그 칸나를 처음보던 시절로 돌아간듯 했다.
소녀는 자신을 안고 있는 팔을 천천히 떼어내고 입술을 열었다.
"나는......"
소년은 점점 칸나에게 다가갈수록 흥분하고 있었다.
그 강렬한 빨강은 여지껏 보아오던 색과 완전히 다른 흥분을 소년에게 안겨주고 있었고 마침내 칸나앞에 섰을 때는 황홀경에 몸이 아찔했다. 소년은 그 아름다움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칸나의 꽃을 낫으로 잘라버리고 줄기를 꺾어버렸다.
꽃이 바닥을 구르며 향기가 넘쳤고 줄기를 꺾는 그 손엔 수액이 손을 적셨다. 그리곤 그 적신 손으로 뿌리를 캐기 시작했다.
어린나이에 맨손으로 뿌리를 특히나 칸나의 뿌리를 캐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겁기도 하거니와 크기도 꽤 큰 무정도 크기는 됐었다.
소년은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어서 보고 싶은데.
보고 싶은데.
뿌리는 보이질 않았다.
홧김에 낫을 들고 그 낫으로 땅을 찍어버렸다.
콰직
뿌리에 닿았다.
콰직 콰직 콰직.
콰직 콰직 콰직 콰직 콰직 콰직.
콰직 콰직 콰직 콰직 콰직 콰직 콰직 콰직 콰직.
뿌리는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산산조각이 나버렸지만 대신 맨손으로 파기엔 한결 쉬워졌다.
조각 난 칸나의 뿌리는 너덜해 진 무 같았다. 흙을 잘 털어보니 껍질은 양파 같기도 했다. 수액은 계속 소년의 손을 적셨다.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어."
소녀는 잠시 망설이는 듯 했다.
"하지만 나도 역시 널 좋아한다고 생각해."
소년은 다시 소녀를 안았다.
그리고 소년이 말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