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가다 2023. 3. 21. 10:39


 
 간혹가다 사람들은 내게 반기독교적이거나 악마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곤 한다. 물론 나도 여느 평범한 사람만큼이나 그런것은 단지 미친 짓이거나 혹은 열등감, 정신병과 같은 어린 날의 치기가 만들어낸 불장난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스스로 '악'을 주장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히틀러 같은 사람들에게도 타인이 보기엔 아우슈비츠는 악이었지만, 스스로는 '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런 악마와 같은 것을 무조건 배척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단지 외면해 버리기엔 그 '악' 혹은 '악마'란 것은 너무나 매력적인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얼마나 많은 소설과 영화들에서 그 '악'이란 매력있는 존재들로 채워져 있는지 살펴본다면, 인식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악이 우리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장남인 드미트리는 자신이 파멸될 것을 알면서도 '악'이라 할 수 있는 '그루센카'에 빠져 있었으며, '파우스트'에선 '계약'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쉽게 넘기기도 한다.
 
 그래.
 
 가만히 생각해보면 저 '계약'이란 것이 악을 규정하는 핵심 단어일지도 모르겠다. 유대인 악덕 사채업자도 결국은 그 계약을 근거로 살을 베려하지 않았던가.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샤일록은 '악'일지언정 잘못된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잘못된 쪽은 그런 조건들을 알고서도 쉽사리 그런 계약에 응했던 채무자 - 샤일록에 비해 매력적이지 않아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 였으며, 오히려 갚지않고 모른척 했던 그 자식이 더 잘못되고 심지어 나쁜 쪽일지 모르는 것이다.
 그 계약이란 적어도 내 안에선 절대적인 것. 그것만 지킨다면 문제는 없는 것이다. 아마도.
 난 그래서 그 '악마'와 계약을 맺었던 것이다.
 사실 내가 계약한 것인 과연 '악마'인지는 모르겠다. 단지 기독교쪽에서 자신들이 믿는 신외에는 전부 악마로 규정하고 있으니 편히 악마라고 부르는 것 일뿐이다. 아마 사람들에 따라선 '정령'이니 '요정'이니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난 어디까지나 그것을 악마라고 부르고 싶다. 그것 외에는 그 '속성'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으니까.
 
 그 '악마'를 별견한 것은 약 세달 전 일로써, 그다지 우연이라고 할 것은 못된다. 그렇다고 필연이라고 하기에도 좀 애매한 것이 나중에 어렴풋이 알게 된 이야기지만 어찌보면 난 그 '악마'에게 선택받았던 것이 아닌가 모르겠다.
 
 
 
 비록 이 이야기를 너희들은 보고 있어서 혹시 나를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혹은 이 글을 보면서 날 아직 모르는 너희들을 위해 나에대해 간단히 설명을 하자면, 올해 스무살의 학생으로, 작년에 입시에 실패한 재수생이며 Y라는 여자친구가 있다.
 
 내 여자친구인 Y는 성격이 괴팍하고 자기중심적인 면이 있었지만, 나의 눈엔 그저 사랑스러운 아가씨로써 그 당시엔 난 그 Y를 위해 내 영혼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난 하루에 몇번씩 공부하는 틈틈이 Y에게 전화를 걸었고 어떻게하면 Y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공부하는 틈틈히 연구를 할 정도였다.
 그러나 Y는 앞서 말했듯이 자기 중심적에 신경질 적이어서 나의 이런 노력에도 Y의 마음을 맞춰주는 것은 여간 힘든일이 아니었다. 나는 Y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만날때마다 장미꽃과 같은 선물을 해주었는데, 아직 대학생도 아니고 재수생의 신분인 나에게 많지는 않았지만, 이런 사소한 지출은 꽤나 부담으로 다가 왔었다.
 물론 아직 부모님께서 생활비나 용돈을 지원해주시긴 하셨지만, 난 간단한 시간제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는데, 공부하는 시간을 많이 그 쪽에 빼앗기자 난 그만두고 '중고시계'를 중계판매 하는 일을 하기 시작했었다.
 '중고시계'의 중계판매를 택한 것은 어떤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연으로 시작한 일이 아니다. 난 원래 시계를 좋아한다. 째깍째깍 거리는 소리와 뒷쪽 덮개를 열었을 때 수많은 작은 톱니바퀴들이 정교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맞춰 움직이는 모습은 나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그 작은 태엽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저확하게 단 한치의 오차도, 흐뜨러짐도 없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내가 또다른 작은 세상의 지배자 혹은 관찰가 된 것만 같았다.
 그런 시계들을 보는 것, 관심을 갖는 것은 내 삶의 몇 안되는 즐거움 중의 하나였으니, 어쩌면 내가 돈을 벌기 위해 중고시계 거래에 손을 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시계 중고거래라고 해봤자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우선 그런 일을 하기엔 내 자본금이 턱없이 부족한 한달에 기십만원 정도 되는 용돈이 전부였고, 처분할 수 있는 루트도 굉장히 한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난 10만원 내외의 저가 품목 중에서 두어가지를 골라 비교적 싼 매물이 나오면 구매해 두었다가 적당한 주인이 나타나면 적당히 처분하는 정도 뿐이었다. 내가 바라는 대로 중고 시계 거래가 매일, 매번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내가 하루종일 매물과 구매자가 나타나길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거래는 1~2주에 한 두번 정도 이뤄졌는데, 보통 중고시계를 판다는 사람은 구하기 쉬웠지만 중고시계를 산다는 사람을 구하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어서 그렇게 7~8개월 정도 지나자 내 수중엔 30여개의 시계를 보관하게 되었으며, 나중엔 자주 구매하는 단골도 생기며 한달에 십여만원 정도 이상의 이윤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시계도 그렇게 해서 나를 거쳐 다른 주인에게 넘어갈 하나의 물건에 불과했다. 물론 처음에는 말이다.
 그 시계는 러시아제 V라는 이니셜을 가진 시계로써 앵커의 저항이 조금 심한듯 째깍거리는 소리가 컸으며, 오른쪽에 태엽을 감을 수 있게 손잡이가 달린 알이 크며 로마 숫자가 적혀있는 조금은 고전적인 그런 시계였다.
 마켓에서 그 시계를 처분하겠다는 광고를 봤을때 통상의 시계들보다 매우 낮은 가격에 등록되어 있었는데, 내가 그 시계를 받았을 때에는 놀라울 정도로 상태가 깨끗해 왜 주인이 그 시계를 그리 싸게 처분을 하려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그 이유를 전 주인에게 물어봤을때 단지 그 전 주인은 "째깍 거리는 소리가 좀 커서요." 라고 했을 뿐이었다.
 
 
 앞에서 조금 말했고, 그 시계의 전주인도 말했지만 그 시계의 째깍거림은 큰 편이었다. 처음에 그 시계를 받았을 때 그 째깍이는 소리는 견딜만한 수준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왠지 그 소리는 점차 커지는 듯 했다. 아니 실제로 커졌다. 마치 오디오의 볼륨을 1시간에 눈금 한칸정도씩 미세하게 계속 키우고 있는 것과 같이 그 시계의 소리는 커져, 나중엔 시계를 보관하는 상자에 넣어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시간이 더 지나자 그 상자마자 소용없게 되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시계의 감아둔 태엽이 모두 풀어지길 기다리는 방법 뿐이었다.
 태옆이 모두 풀리면 소리가 작아질테니 분해해서 앵커를 조절하겠다고 난 다짐을 했다. 전 주인의 말로는 이틀에서 사흘 정도면 태엽이 다 풀린다고 했다. 다행이도 아직 난 이 시계를 마켓에 팔겠다고 광고를 하진 않았다. 중계상으로써 약간 유명해지며 자리를 잡아가는 이 때에 구매자에게 이런 시계를 내놓는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는다. 자고 내일 아침이면 모두 좋아질 거야. 라고 처음엔 생각했다.
 하지만 시계의 태엽이 다 풀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난 그 태엽이 모두 풀리길 기다리며 밥을 먹고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며 재미없는 TV를 보다가 수능 문제집을 16페이지나 풀면서 하품을 두차례나 했지만, 벾에 걸려있는 시계를 확인해 보면 놀랍게도 시간은 채 30분도 지나질 않은 것이다. 그렇지만 겨우 30분 남짓한 그 시간도 저 거슬리는 V의 째깍거리는 소리에 30시간 이상으로 느껴져 버렸다. 이런 맙소사.
 난 미칠 노릇이었다. 소음이 너무 심해 뒤를 열어 엄두도 낼 수 없을 지경인데, 판매자의 말로는 앞으로 이틀정도 더 저 소리를 들어야 한다니 말이다.
 그러나 저대로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난 시계에 어떤 문제가 있나 살펴보기 위해, 급한대로 화장실에서 두루마리 휴지를 손으로 대충꼬아 귀에 꽉 눌러 막아놓고, 그 시계를 책상위에 조심스레 꺼내어 보았다.
 
 
 
 난 시계의 소리가 왜 저리도 큰 지 알 수가 없었다. 겨우 앵커의 저항으로는 이 정도의 소리는 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난 책상 위에 올려진 그 시계를 뒤집어 봤다. 다행히도 그 시계는 뒷면이 유리로 되어있어 분해하지 않고도 내부를 완전히는 아니지만 12시에서 4시방향 정도의 부채꼴 모양으로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어있었다.
 뒷면에 비쳐진 그 모습은 시계광인 내가 반할 정도로 역시나 아름답게 되어있었다. 태엽에 감겨진 작은 금속으로 반짝이는 마치 투명하게 보이는 듯한 은색으로 된 실들은 쉴 새 없이 풀어져 가고 있었고, 그 실들의 풀림에 맞춰 마치 금빛 같이 찬란하게 빛나는 그 태엽은 역시 조금씩 톱니바퀴에 맞춰 오차없이 정확하게 맡은 바 움직임을 하고 있었으며, 단지 그 째깍이는 소리만 아니었다면 그 일사분란하게 태엽과 바늘들이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북한의 대형 메스게임을 보듯이 경이로움과 함께 오싹함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내가 그렇게 넋을 빼고 시계의 뒷모습을 보고 있을 때, 어찌보면 그 시계가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시계가 인간의 언어로 내게 말을 걸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시계는 째깍이기만 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래 날 정신병자라고 욕해도 좋고 내가 착각이나 환청을 들은 것이라고 비난해도 좋다.
 그러나 그런 비난들을 무릅쓰고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난 분명히 그 시계와 대화를 나눴기 때문이다. 아니 대화라는 단어는 조금 부적절하다. 언어는 언제나 불완전한 것이니까, 늘 오해와 오역의 가능성이 함께 존재한다. 내가 시계와 나눴던 그 '의사소통'엔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그래, 교감이라 하자. 난 분명히 그 시계와 일종의 교감을 나눴던 것이다.
 
 
 그 시계는 처음엔 나의 이름을 물어보고 출생연도를 물어보더니, 이윽고 자신의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니 했다고 생각한다. V는 - 자신을 그냥 메이커인 V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 내가 자신의 세번째 소유자라고 했으며 - 주인이란 말은 하지 않았다. - 언제나 자신은 자신의 소유자와 대화를 하려고 했고, 큰 째깍거림은 그들의 관심을 얻기 위한 것이라 했다.
 
 그러면 그 녀석은 다른 소유주들과 같이 나 역시 자신과 '계약'을 맺고 무언가를 자신에게 해주게 된다면 역시 다른 소유주들과 마찬가지로 내게 어떤 '댓가'를 주겠다고 했다.
 난 V에게 물었다.
 
 "계약?"
 
 "그래 계약, 계약이란 단어 외에 다른 어떤 단어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네.
 
 아 물론 공정성에 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누가봐도 이 계약의 조건이라는 것은 나에게 유리하다기 보다도 자네에게 유리한 것이거든. 내 전의 소유자들도 조건을 듣고는 전부 나와 계약을 맺었고 모두들 그 계약에 만족해 했다네. 조건에 관해 불만을 가진 놈은 한 놈도 못봤어."
 
 
 녀석은 아무래도 나와 그 '계약'이란 것을 몹시도 맺고 싶어하는 듯 했다. 보통 사기꾼들이나 자신들이 손해보는 장사라고 선전하고 다니기 마련이니까. 또 대뜸 시계가 말을 걸어 자신과 계약을 맺자고 하는데 그걸 믿을 사람이 대체 누가 있을까? 또한 그 계약에 전 소유자 모두가 만족을 했다면 두번씩이나 사람을 거쳐 나에게 올리도 만무했다. 결론은 난 녀석을 믿을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호기심이 생기는 것까진 막을 수가 없었다. 인간의 호기심이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란 것은 굳이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잘 알고 있으리리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더라면 아담은 그 쓰디쓰고 맛대가리 없는 선악과 따위는 따 먹지 않았겠지. 나 역시 그 소돔의 고모라처럼 소금기둥이 되었을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일단 그 계약조건이라는 걸 들어보지. 계약 내용이 뭔데?"
 그 시계는 최대한 자제하려고 했지만 그 평정심 사이로 빼꼼히 삐져나온 내 호기심을 읽고는 질문을 듣자마자 미소를 지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미소를 지은 것 같았다. 왜 내가 그렇게 느꼈냐하면 그 시계의 틱틱거리는 소리가 여느 때보다 밝고 경쾌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이 흥분하면 고동이 빨라지는 것과 같이 말이다.
 
 "그래. 일단 들어보라구. 절대 들어보면 후회는 하지 않을테니까. 난 항상 공정하고 상대에게 이득이 되는 거래를 추구하는 편이라고. 하하하. 그래, 물론 그게 너한테나 나한테나 무척 사소한 것일수도 있지. 너가 보다시피 너와 나는 니들 한눈에 보기에도 전혀 다른 재질로 되어 있지 않겠나? 물론 구성되어 있는 부품 - 아 인간은 부품이라고 하지 않지? 어쨋든 - 도 또한 다르지.
 그러므로 너와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능력도 다른 것이 당연할 거야. 난 나의 능력 중에 아주 하찮으면서 기본적인 능력을 발휘해 너에게 그동안 갖지 못한 능력을 주겠네. 대신 너 또한 너의 사소한 능력을 발휘해 주었으면 하네."
 
 시계는 초침이 두어번 지나갈 정도로 말을 끊더니 본격적으로 계약조건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내가 원하는 것은 자네에게 있어서 그저 사소한 것이라네. 전의 소유주들은 단지 그것 뿐이냐고 오히려 내게 반문할 정도였다니까. 앞서 말했듯이 난 나의 소유자에게 무언가 어려운 것을 요구하진 않아. 어차피 인간들이란 할 수 있는 것들이 한정적이지 않겠나? 물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지만 말이야. 자네에겐 아주 사소한 것이 나에겐 아주 어려운 것일 수도 있고, 혹은 그 반대로 나에게 있어서 아주 사소한 것이 자네들 즉, 인간이란 족속에게는 매우 어려운 것일수도 있지.
 자 나를 봐. 내 몸을 보라구.
 네가 보다시피 난 태엽을 감아 움직이는 태엽식 시계이지. 내가 움직이려면 반드시 옆쪽에 둥그런 그 빌어먹을 태엽을 감아줘야 해. 그러나 난 내 의지대로 그 태엽을 감을수조차 없어. 왜? 너희와 같이 그 '손'을 갖고 있지 않지 않겠나. 그 태엽을 감으려면 언제나 '손'을 가진 것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구.
 난 내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기관이라곤 이렇게 빙빙 한 방향으로만 도는 몇개의 태엽과 시침, 분침, 초침이 전부이니 말이야. 그걸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태엽을 감을 수는 없지.
 아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말아. 이 태엽이 다 풀어진다고 해서 내가 죽는다던가 하는 것은 아니니까 말야. 단지 난 잠에 빠질 뿐이라고.
 근데 잠이라는 비유가 적당할지는 모르겠군. 그냥 적당한 말이 없으니 잠이라고 했지만, 실은 죽음이라고 하는게 더 어울릴지도 몰라. 아니 매번 태엽을 감으면 다시 깨어나니 잠과 죽음의 중간정도라고 하면 되겠군.
 내가 그런 비유를 쓰는 이유는 그 태엽이 다 풀어질 때는 정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야. 내가 아무리 '잠'이란 것을 자보진 못했다지만, 인간이 잠을 잘 때 어떤 것을 느끼고 보게되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
 그래. 난 그게 너무 싫단 말이야.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 아무것도 인지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으며 정지해 있는 것이 너무 싫어. 더구나 그 '죽음'의 상태에서 깨어났을 때 몇 일, 몇 시간, 몇분, 단 몇 초라도 세상이 바뀌어 있는게 싫단 말일세.
 다시 말해 난 내 의식이 끊어지는 걸 원치 않아. 난 깨어 있어야 한다고,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해!! 모든 걸 바라보아야만 하며, 단 한순간도 멈춰서는 안돼! 그런데 빌어먹을!
 그게, 그게 도무지 내 의지대로 되진 않는단 말야! 비록 난 우주의 시작과 함께 했던 존재일 지언정 아니 대체 어떻게 할수가 없어. 신은 모든 걸 주진 않는다고 했던가? 날 이렇게 불완전한 존재로 만들꺼만 아예 만들어지지 않는 편이 좋았을 꺼라고 난 매초 초심이 한번 움직일 때마다 생각한다네. 하지만.... 하지만, 결국 이렇게 된 거 어떻게 하겠나. 인간도 그렇겠지만 모든 생물은 다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남으려 최선을 다하지. 나 역시 그렇다네.
 그래서 자네들, 인간에게 이렇게 나와 계약할 것을 요구하는 거네. 자네가 해 줄 것은 간단해. 그저 내 의식이 끊어지지 않게 하루에 단 한번, 아니 이틀에 한번이라도 좋아. 내 이 오른쪽에 혹처럼 달린 이 태엽을 돌려주지 않겠나?
 분명이건 네겐 정말 별 힘이 들지 않는 아주 간단한 일일게야. 난 너가 그렇게 함으로써 끊어지지 않는 의식을 얻을 수 있단 말이네.
 생각해 보게.
 끊이지 않는 의식.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말일세."
 
 
  그 시계는 생각만 해도 즐거운지 초침이 1초 1초 움직일 때마다 마치 경련을 일으키듯 부르르 떨곤 했다.
 물론 저 시계의 말은 별로 틀린 것은 없었다. 태엽을 감는 정도의 일이야 하루에 몇번이라도 해 줄수 있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난 원래 시계를 좋아했고 오히려 디디딕 디디딕 태엽을 감을 때 들리는 톱니바퀴 소리는 내게 즐거워서 오히려 감동적이기 까지 한 그런 소리였다. 원한다면 그 시계가 원하는 것을 넘어서 하루 종일 그 톱니바퀴만을 감을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나의 이 사소한 노동의 이유가 완벽하게 성립되진 않는다. 무릇 계약이라고 한다만 이 시계가 말을 해준대로 내가 이런 '사소한 노동'의 댓가로 역시 녀석도 나에게 '사소한 노동'을 해주어야만 한다.
 난 그것을 물었다. 그래 과연 나의 그 사소한 노동에 대한 댓가는 무엇인가
 
 
"그래 깜빡했군. 내가 자네에게 제공하게 될 것을 말야. 미리 말했듯이 자네와 난 신체 자체가 틀려. 구성되어 있는 것 , 할 수 있는 것 다 말야.
 즉, 자네에겐 매우 어렵고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일들이 내게는 아주 쉬운 일이란 말이네. 예를들어 나는 이 초침을 아주 일정하고 같게 움직일 수 있다네. 인간들은 내게 아주 간단한 이런걸 할 수 없겠지. 그러니까 시계를 보고 항상 시간을 체크하는 것 아니겠나?
 물론 이런건 내 사소한 능력 중의 하나에 불과해. 그저 자네들이 무의식적으로 너희가 바라지 않음에도 심장을 뛰게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지. 그래 사실이 초침의 움직임과 태엽이 풀어짐은 생리 현상과 같은거라네. 내 의지로 정지시키거나 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 해. 태엽이 감겨 있는 동안 그저 다 풀릴때까지 저절로 풀리게 놔 두는 수 밖에 없어. 더구나 몇번이나 말했지만 난 손이 없지 않겠나. 인간이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같이 나 역시 이는 피할 수 없는 - 태엽이 다 풀어지는 것이란 - 그런 것이지.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태엽은 매번 감아도 언젠간 다 풀린다. 뭐 이런 말일세. 하지만 인간보다 더욱 끔찍한 것은 난 매번 이런 일을 겪는단 말이야. 자네들과는 다르게.
 인간들은 단 한번의 죽음만 겪으면 끝이겠지만, 난 도저히 그럴 수 없지 않겠나? 그래서 난 최대한 그런 역겨운 체험을 줄이고 싶을 뿐이라네. 단지 그래 그렇게 태엽만 감아주면 돼. 하루에 한번, 아니 이틀에 한번이라도 좋아. 자네가 나에게 그것만 해 준다면 난 자네에게 - 놀라지 말게 - '시간'을 주도록 하지. '시간' 말이야.
 물론 시간을 무한으로 확장해 자네에게 준다거나, 혹은 멈추게 한다거나 그런건 아닐세."
 
 그는 자기가 제공한다는 시간이라는 것이 딱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무엇인지 모르지만 세상에 아마 유일할 지도 모르는 이 '말하는 시계'에게 내 마음을 빼앗겼고, 어쩌면 그 전에 이 '시계'가 말하는 건 모든지 들어줄 준비가 돼 있었는지도 모른다. 난 그 정확한 의미를 알지도 모른채 그 시계와 덜컥 계약을 맺고 말았다.
 
 시계는 정말 내게 '시간'을 제공하였다. 이 '시간' 의미는 대략 두가지이다. 이 중 한가지는 말로 설명하기 비교적 쉬운 편이고 명료하지만, 다른 한가지는 매우 설명하기 난해하다. 그러나 아무리 설명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내게는 그것들을 너희에게 설명한 의무가 있겠지. 아니 있다고 생각한다. 그 설명을 듣는 것은 너희의 의무이기도 하고.
 우선 말로 설명하기 쉬운 것부터 이야기를 해보자면, 그 시계는 내게 아주 약간이지만, '시간'의 정확함을 주었다. 물론 이 '시간'의 정확함이라는 것이 시간을 멈춘다거나 혹은 과거로 돌린다던가 또는 미래로 이동시킨다던가 따위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물리적인 비유를 들어 표현하자면 그 정확함이 일어나는 원인은 '연장'과 '단축'에 의해  의미에 더욱 가까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시간을 과거로 돌리는 것과 미래로 이동시키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가령 한 수레가 비탈길을 내려오고 있다고 하자. 누가 그 수레에 다른 힘을 가하지 않는다면 그 수레는 비탈길을 따라 중력가속도 9.806미터퍼세크스퀘어의 힘을 받아 비탈각에 사인, 코사인 영향을 받은 속도로 각각의 운동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시간의 흐름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과거로 돌린다던가, 미래로 이동한다는 것은 그 수레를 뒤로 끌고 간다던가 혹은 순식간에 점프를 해서 어느 지점으로 위치가 바뀌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이와 달라서 단지 약간의 힘을 더하거나 빼 그 수레의 속도를 좀 더 빠르게하거나 늦추게 하거나의 정도이다. 물론 그 수레에 힘을 가하거나 빼는 것은 내 의지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물론 이는 단지 내 기분상의 것일지도 모르고 실제론 전혀 시간이 늘어나거나 줄어든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이를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결정적으로 믿게된 계기가 있었으니 이 시계와 계약한 후 얼마되지 않아서 였다.
 
 난 시계를 좋아하는 것에서 이미 밝혔지만 - 아니 말을 안했었나? 아무튼 - 비교적 정확하고 일사분란하며 다곳이 정리된 것을 좋아한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나 공부를 할 때 줄곧 이를 내게도 적용하여 나도 시계의 톱니바퀴 일부터럼 정확히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런 내 성격 때문인지 비교적 모든 약속엔 시간을 정확히 맞추는 편이었다.
 그러나 누구나 알다시피 난 시계가 아니고 가끔, 아니 꽤 자주, 어쩌면 생각보다 많이 그 시간 약속을 인지하고 있지 못하는 사이에 난 틀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시간 약속을 지킨다.'는 정의는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기준에선 내가 그다지 어기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가령 내 그녀 y의 경우엔 보통 시간의 30분 정도는 우습게 어겨주곤 하지만, 본인 스스로는 '약속을 지켰다'고 판단하며, 아는 형인 O의 경우에는 정한 시간보다 더 빨리 나오는 것은 용납해도 더 늦게 나오는 것은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 O형보다는 기준이 엄격하지 않지만, Y처럼 너무 느슨하지도 않다. 난 보통 전후 10분을 기준으로 약속시간에 정확히 도착했는가를 판단하곤 한다.
 
 
 가끔은 이렇게 Y와 다른 시간 관념 때문에 초반엔 다투기도 했지만, 그래도 Y는 내게 있어서 정말 사랑스럽고, 또 그렇게 나와는 달리 무엇에든 얽메이지 않고 자유로운 점이 그녀의 매력이었기 때문에, 나중엔 난 내 기준을 그녀에게 강요하기 보다는 그녀의 기준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법을 터득했다. 새자안의 알록한 카나리아를 보는 것을 즐거워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자연에서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는 오리를 보는 것을 즐거워 하는 사람이 있는 법이니까.
 그래. 그녀는 하늘을 멋지게 수놓는 오리와 같았고 난 그런 그녀가 좋았으며, 그녀를 그렇게 구속하고 싶지 않았다.
 이야기가 엉뚱하게 새어갔지만 다시 돌아와서, 결국 말하고 싶은 것은 난 다른 이들보다 엄격하지 않은, 오히려 비슷한 시간 기준을 갖고 있으며, 사람에 따라선 내가 늦는다고 판단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내 기준에선 시간 약속을 잘 어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계와 계약을 맺은 이후로 난 단 '한번도' 세상 거의 누구라도 불평하지 않을만큼 시간을 잘 지키게 되었다.
 이렇게만 이야기를 한다면 이게 무슨 의미인지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내용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문맥 그대로 난 정말 '정확하게' 시간을 지키게 된 것이다. 가령 내가 Y와 늘 했던 것처럼 오후 7시에 그녀의 학원 앞에서 저녁을 먹기로 약속을 정했다 생각해보자, 그럼 나는 물론 그 7시에 맞춰 준비를 하고 행동을 한다. 그 약속장소까지의 거리가 30분 정도라면 1시간 전에 미리 씻고 옷을 골라 입으며 6시반쯤에 집을 나선다.
 그러나 그렇게 시간을 재고 나가더라도 보통 교통이라던가 내 걸음걸이 속도의 불규칙함, 곳곳에 널려있는 불확실성, 그리고 내가 그 거리가 정확히 30분이 걸린다고 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엄격한 의미의 7시에 정확히 도착한 적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로의 사정이 좋거나 컨디션이 좋아 걸음이 빠를 때에는 10분 먼저 도착할 때도 있지만, 반대로 사정이 좋지 않을 떄에는 10여분 늦게 도착할 때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는 모두 내가 허용한 오차범위 내에서의 시간이기 때문에 크게 난 문제 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