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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신발을 사고 난 다음은 언제나 한 두달은 그 신발 때문에 연례행사처럼 고생하곤 한다. 흔히 말하는 '길을 들이는' 기간 때문인데 신발의 종류에 따라 그 기간은 다르지만 보통은 짧게 한달, 길게는 세달까지 가곤 한다.
물론 그 증상 또한 신발에 따라 천차만별 달라서 이번에 새로 산 신발은 오른쪽 새끼 발가락에 엄지 손가락만한 물집과 왼쪽 발 뒷꿈치에 쓸려서 생긴 것 같은 상처를 안겨 주었다.
이런 상처로 걸을 때마다 생기는 고통은 꽤 대단한 것이어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성욕, 식욕등을 싹 없앨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렇게 아픈 발을 끌고 수업을 받으러 학교에 가거나, 집으로 돌아오거나, 어디를 놀러가거나 이렇게 돌아다니다보면 아무래도 평소보다 걸음이 많이 느려지게 되고, 그 느려지는 걸음만큼이나 다른 여러가지의 것이 보여지게 된다. 평소엔 보여지지 않던 많은 것들은 어느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평소에 무시하고 지나갔을 법한 횡단보도는 주위에 차가 지나가는지 반드시 확인하게 되었고, 있으나 마나한 신호등은 내가 하는 행동의 절대적인 규칙이 되었다.
그러므로 내겐 공간에서 또다른 공간으로의 통로정도였던 길이, 이제는 보내는 시간이 자연 늘어나게 되어 그건 단지 통로의 기능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공간으로써의 역할로 내 삶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새로운 삶의 공간이 형성되고 그로인해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면서 그 관계는 당연하게도 내 삶의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아무튼 덕분에 집에 돌아오는 일은 꽤나 고역이 되었다. 평소 같았으면 집에 돌아오는 길만큼은 피곤해도 가벼울만 한 것인데, 한 걸음 한 걸음 걸을때마다 발은 욱씬욱씬 거렸고, 오른발은 통증 때문에 발이 터질 것만 같았다. 될 수만 있으면 학교 기숙사에서 지냈으면 좋겠지만, 내가 살고 있는 집은 학교에서 지하철을 타고 무려 1시간이나 걸리는 곳이었다.
평소와 같으면 무시하고 갔을 작은 건널목과 횡단보도도 왠지 쉽게 건널 엄두가 나지 않아 신호를 기다려본다. 신호를 기다리며 건너편 인도에 황량하게 세워진 신호를 하릴없이 쳐다보는데 건너편 구멍가게 옆 골목에서 무언가 바쁘지만 매우 느리게 꾸물꾸물 걷는 것도 아니고, 뛰는 것도 아닌 이상한 걸음으로 무언가 횡단보도로 다가온다.
호기심이 들어 얼핏보니 나이 꽤나 잡수신, 아니 자세히보면 이미 여든이 넘어보이는 노인이었는데 왠지 도와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몸이 불편해보였다. 그렇지만 난 발도 아프고 행상을 보아하니 도와주는 것은 왠지 실례인 것 같아 그만뒀다.
행색이 어떠했냐면 매우 불편해 보이는 걸음걸이와는 다르게 신발은 군인이 신을법한 번쩍번쩍 빛나는 검은 가죽 워커를 신고 있었고, 상의는 왼쪽에 어떤 회사의 이름이 적혀있는 작업복 점퍼에 손에는 막 무언가 작업을 하고 온 듯한 목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러고서 매우 느린 모습이지만 부산하게 아장아장 어디론가 가고 있었는데, 왠지 그 모습이 매우 인상에 남아 집에 돌아가고 나서도 그 모습은 좀처럼 잊혀지지 않았다.
모든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책상위에 뿌옇게 먼지가 쌓에 흐릿해지듯이 다른 기억이나 혹은 망각에 의해 없어지기 마련이지만 그 기억은 오히려 점점 또렷해져서 내 머릿속의 영토를 점점 확장해나가기 시작했다.
잠잘 때도 꿈에 그 노인이 나와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빠르지만 매우 느리게 어디론가 가고 있었고 밥을 먹고 있을때도 그 노인은 밥알 위에서 사라지지 않았으며, 심지어 여자친구와 섹스를 할 때도 그 노인은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섹스할 때 그 노인의 기억은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문제는 발기가 지속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상하게도 평소엔 사정할 때 쯤인데, 사정하지 못하고 오히려 발기가 사그러들어 매우 난처했다. 이건 여자친구에 대한 예의도 아닌 것 같아 처음엔 다른 여자 연예인들을 억지로 생각하면서까지 겨우겨우 사정했지만, 나중엔 사정한 척 연기를 하고 콘돔을 재빨리 빼내 휴지에 말아 버리곤 했다. 다행히 여자친구는 사정했는지 안했는지 콘돔을 일일히 확인하는 타잎이 아니었다.
그 뒤엔 밥 먹을때나 공부를 할 때나 뭘 할 때도 그 노인은 내 눈에 아른거려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난 누군가와 상담할 수 밖에 없었다. 정신병원이든 부모든 친구든 여자친구든.
난 내 여자친구에게 모두 털어놓기로 하고 그 동안 거짓 사정을 한 점과, 섹스중에 다른 여자를 생각했던 점, 그렇지만 모든 것의 원인은 그 노인이라는 점까지 차근차근 이야기를 했다. 그렇지만 굉장히 화를 낼 것이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내 여자친구는 생각보다 그 이야기를 담담하게 듣더니, 자신도 나와 섹스할 때 다른 남자를 생각한다고, 자신도 오르가즘을 연기한다고 괜찮다고 위로해줬다. 이런!!!!!
아무튼 그런 약간의 다툼으로 난 다시 금방 사정할 수 있게 되었고 한달뒤에 신발은 길이들어 더 이상 발이 아프지 않게 되었으며, 더 이상 그 노인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