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몇 년전 쯤인가. 나와 10여년이 된 친구 M은 갑작스레 인도로 두 달 정도 여행을 갔다온 적이 있었다. 나도 그 때 그 M과 함께 인도에 가보고 싶었으나 아직 난 졸업을 위해 봐야 할 시험이 몇 개 더 있었고, 취업 준비에 바빴으며, 학기 중 펑크낸 학점을 메우기 위해 계절 수업을 들어야 했고, 등록금을 마련해야 했으므로 가질 못했다. 당시에 주로 내 일과는 이랬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차가운 물로 눈꼽을 데고, 솔이 다 풀어진 칫솔로 이를 닦은 다음, 티셔츠를 뒤집어 입고 지하철을 두시간 타고 학교에 가서 고전 9시에 있는 3시간 짜리 강의를 듣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돌아와 영어 공부와 졸업시험 공부를 하고, 오후 4시쯤엔 밤 12시까지 편의점에 서서 담배 박스 옆의 바코드를 쉴 새 없..
이렇게 주로 흐린 날에 글을 쓰게 되는거 같다. 사실 전 글은 문장들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문장들이 따로 놀고 통일감이 없어 보이는 증상은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다. 어제 따라놓고 마시지 않은 길다란 종이컵에 있는 커피를 마셨다. 어제든 오늘이든 맛은 여전히 쓰다. 뇌가 뒤죽박죽 망가지기 전에는 이렇게 흐린 날을 좋아했었다. 눈부신 빛과, 살 갗을 지지는 듯한 태양빛의 열기는 별로 유쾌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흐린날에 몸이 아파오고, 정신이 우울해지는 것을 견딜 수 없는 지금은 그저 구름 한점 없이 맑은 날이 제일 좋을 따름이다. 그저 날씨가 흐리다고 사람의 기분이 나빠지고 우울해지고 생각보다 난 더 연약한 생물이었구나. 이런 날은 그냥 선풍기를 틀어놓고 적당히 얇은 이불안에서 아무것도 하..
전화번호부를 이리저리 뒤적여보지만, 도통 전화를 걸어볼 사람은 보이질 않는다. 원래 그런 것이다. 전화하고,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약속을 하고, 만나고 싶은 날엔 도통 연락할 사람도 만날 사람도 떠오르질 않는다. 외로움은 그 자체로 하나의 현상이지 문제는 아니다. 만약 문제였더라면 분명히 해결방법이 있었을텐데, 적어도 지금의 내 외로움엔 그 어떤 해결책도 없어보인다. 외롭지만 역설적으로 누구와도 만나고 싶지 않다. 누군가를 만난다고 해서 이 현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대신에 난 밖으로 나선다. 누군가와 만난다는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북적거리는 사람 가운데에선 외로움이란 간혹 희석되기 마련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꽤 많았지만. 거리는 그다지 변한 게 없다. 항상 다니던 그 길은 ..
최근에 글을 적으며 자꾸 문단과 문단의 유기성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뭐랄까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문단과 문단이 서로 유리되어 따로 존재하는 듯한 것만 같다. 문단에서 문장은 통일성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문단과 상관없어 보이는 것만 같다. 이런 느낌을 갖는 건 비단 최근의 일뿐만이 아니다. 과거에도 이런 느낌을 많이 받아, 한 때는 지나지게 접속어를 사용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또한 등등등 수많은 접속어로 내 문장과 문장을 위태하게 붙잡고 있었던 적도 있었으나, 그것도 한 때 뿐이었다. 언제든지 내 문장과 단어들은 손가락 사이 모래처럼 흘러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고, 접속어 하나 없이 문장과 문단을 완성하는 김훈의 글을 읽고는 곧 글 쓰는 것을 그만뒀었다. ..
아침에 일어나니 온몸이 아팠다. 아마 비가 올 것 같았다. 일기예보를 확인해보니 날도 평소보다 쌀쌀한 것 같았다. 아직 봄은 완전히 지나가지 않은 것 같다. 이런 계절이 위험하다. 이런 날씨는 잠깐 풀렸던 추위에 방심하고 있던 내 정신에 어느 새인가 뒤로 돌아와 주머니 칼로 내 심장에 난도질을 할지도 모른다. 다행히 온몸의 근육통이 방심하지 못하게 경각심을 일깨워 줬다. 새벽에 웬지 S에 관한 글을 쓰고 싶어졌었다. 그렇지만, 생각보다 난 S에 대해 아는게 없구나 라는 생각에 그만뒀다. 과거엔 헤어진 애인에 관한 글을 많이 쓰곤 했었다. 딱히 그러려고 그랬던 건 아닌데, 한 때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글로 써보는게 목표인 때가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서툴렀던 나는 제대로 된 사랑을 써낼 용기도 없..
https://youtu.be/FpxYXO899MY 이브 - 잠에 취해
최근에 다에게 어떤 음악을 주로 듣느냐고 물어본다면 '타마키 코지'라고 답하겠다. 안전지대의 보컬은 그는 목소리가 매력적인 가수다. 생각해보면 나 어릴 때는 왜 '안전지대'의 투어 티셔츠가 유행이었는지. 별로 이해할 수 없는 유행이라 생각하지만, 유행이란 뭐 그런거니까. 사실 별로 글을 적고 싶진 않다. 늘 고통스럽게 말하지만, 별로 쓸 말도 없고, 누군가 보고 내 글의 의미를 이해해줄리도 없는데, 상대가 웃지 않는 개그를 하는 개그맨처럼 비참한 것도 또한 없다. 원래 글이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모두 현실의 불안정과 불안함을 딛고 나오는 법이다. 내가 글을 적는다는 것은 그만큼 삶이 불안정하고 괴롭다는 의미다. 글자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전달하고 싶은 너희에게 담겨진 내 사랑과 애정과 미움과 증오가 ..
한동안 글을 쓰지 않다가 다시 글을 쓰게 되었다. 늘 하고 싶은 말이 없지는 않았지만, 여러가지 핑계로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은 늘 있다가도 없었다. 말이라는 것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다. 의미가 있다가도 없다는 것은 나의 의미를 전하지 못하는 것인지, 전할 수가 없는 것인지, 전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그렇지만 늘 알아줬으면 하는 것이 사람 마음이고 욕심인지라, 전하지 못할 의미없는 의미들을 글 속에 내 생각을 숨겨서 적어넣는다. 알아줬으면 좋겠지만 전할 용기가 없는 생각들을 증발해버리기 전에 볼펜의 잉크에 담아 끈적한 눈물처럼 꾹꾹 종이에 새기듯이 눌러 쓴다. 밑의 블럭을 하나 빼어 위로 올려 놓는다. 쌓아둔 탑이 위태위태 하다. 젠가 게임 원리는 간단하다. 하나로 쌓아올린 탑의 아래쪽 ..
이 공책을 펴 보는 것은 10년 만이다. 10년전의 K는 좋은 일, 안좋은 일, 꿈, 약속을 적어가며 이 노트에 추억으로 남겨달라고 했었다. 하지만 10년여 동안 이 다이어리를 단 한페이지도 채우질 못하다가, 오늘 페이지를 열어 글을 적는다. 이렇게 과거 다이어리에 글을 적는 것은 이 다이어리를 채우질 못하면 다른 다이어리나 노트를 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K 보고있나? 너가 선물했던 이 노트, 다이어리, 10년은 아니지만 대충 10년 후인 지금도 쓰이고 있다." 하지만 K는 나와 친하게 지냈지만, 연인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내 글을 좋아했던 K는 내가 더 많은 글을 써내려가길 원했지만 난 더 글을 쓸 수 없는 상태였었고, 더 써내려갈 필요 또한 없었다. K는 날 좋아했고 나도 K를 ..
휴지를 돌돌 말아 펜의 머리 부분을 닦아낸다. 닦아낸 휴지엔 펜에서 묻어나는 질펀한 검은 잉크가 점점히 그려져 있다. 왜 일까? 난 다른 사람들보다 멍청하게시리 손에 잉크가 많이 묻는 편이다. 무언가 공책에 공식을 적고 날 때면 손에 한가득 잉크가 묻어 있는 때도 많았다. 그래서 종종 펜을 쓰다가 휴지나 헝겊을 이용해서 펜의 앞부분이나 손이 닿는 부분을 닦아내곤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줄곧 관찰해보면 그다지 손에 잉크가 묻어나는 것 같진 않는다. 나만 그러는지 몰라도 그 다른 사람들이 펜을 닦아내는 것을 보진 못했기 때문이다. 아마 펜의 차이는 아닐 것이다. 회사에서는 모두 같은 펜을 쓰니까. 아마 누구나 모두 이런 자신만의 특징이랄만한 것들이 하나 씩은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난 손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