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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첩속 거짓말

구멍

야가다 2020. 4. 24. 20:47

내 주위의 가장 최근의 죽음은 작년 겨울의 일이다. 그 때 난 여러개의 숫자를 놓고 어떤 것이 빈 칸에 잘 맞는 숫자인지 씨름을 하고 있었는데 그 죽음은 전화를 통해 내게 알려져왔다. 그러나 난 이 일을 내일까지 끝마쳐야만 했고 죽은 사람은 그다지 친하거나 면식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으므로 '아 또 누군가가 죽었군'하는 짧은 감상 뿐, 전혀 비통하거나 슬픈 마음따윈 들지 않았다.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 정도가 죽는걸로 슬퍼해야 한다면 슬퍼하지 않을 날이 없을 게 아닌가. 난 무시하고 일을 계속 했다.
 
난 나비효과를 믿지 않는다. 물론 세상엔 가끔 믿기 힘든 일이 존재하고 극히 예외적인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므로 펄럭이는 나비의 날개 바람이 영향이 되어 거대 태풍이나 허리케인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전혀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정말 만약 그렇다면 지구상에서 일으키는 나비 날개보다 큰 에너지의 바람이 가득한 이 세상에 인류는 거의 멸종의 위기에 처하지 않았을까? 물론 방아쇠 효과 이론이 나비효과의 실제 주요 이론이지만 프렉탈이나 카오스니 사실은 다 농락하는 것일 뿐이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난 하던 일을 계속하려 했으나 일은 좀처럼 다시 손에 잡히질 않았다. 그래도 장례식에는 가봐야 하질 않겠냐는 핑계가 내 뇌 한 구석에 남아 계속 날 몰아내고 있었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시간은 11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슬슬 돌아가든지 장례식장에 가든지 해야 할 시간이었다. 지하철 막차를 타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기 때문에 난 서둘러 건물을 빠져 나왔다.
내가 지하철 막차를 싫어하는 데 특별히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막차의 시간에 쫓김이라는 것이 싫었고 또 차안의 분위기가 싫었다. 지하철의 막차안은 평소와 다른 이상한 냄새가 흐른다. 세상의 모든 구질함을 모두 한덩어리로 뭉그러뜨려 한 구석에 쳐 박은 느낌이랄까. 그런 느낌에 섞이는 자신이 싫었다.사실 막차가 아닌 11시 이후의 차를 탄다고 해서 특별히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사당에서 탄 지하철은 퇴근 시간이 많이 지나서인지 자리는 한산했지만 분위기는 막차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술취해 좌석에 길게 누워 조는 개새끼들, 서로 끌어 안고 여기가 여관인줄 아는 애송이들, 이어폰 소리를 크게 해 옆에 사람까지 다 들리도록 쓰레기 음악을 듣는 멍청이들, 날이 바뀐다고 이런 고정멤버가 크게 바뀌진 않는다.
그런 고역 고역을 다 거치며 지하철을 타는 이유는 강을 비교적 짧은 시간동안 자유롭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하철이 성내에서 강변을 향할 때 열차는 한강위를 나는듯이 지난다. 비교적 짧은 10~20초 사이의 시간이지만 난 이 순간을 위해 이 차를 탄다고 할 수 있다.
다리의 차량 불빛이 강에 비춰진 다리의 모습과 끝없이 펼쳐졌지만 잔잔하게 조용히 흐르는 그 강물은 이러한 모든 고역을 의미없게 만들기 충분했다. 물론 그 짧은 시간을 위해 너무 많은 것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고 또 그렇게 강이 좋다면 하루종일 강가에 앉아 하릴없이 바라보면 되지 않느냐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내겐 이 정도가 적당하다. 10초 정도면 충분한 것이다. 5초는 너무 짧고 30초 이상은 너무 길다.
 
구의역에 내려 곧바로 역을 빠져나가지 않고 선로 옆의 벤치에 앉아 조금 더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집에 돌아갈지 아니면 상갓집에 가볼지. 아무래도 상갓집에 가려면 지금의 복장보다는 집에서 향 냄새가 밴 검은 옷을 입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다시말해 어차피 집에는 한번 들려야 한다. 그러니 어차피 집에 들려야 할 거 집에 가는 길에 천천히 생각해도 좋지 않느냐라고 속편한 소리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 성격상 집에 돌아간다면 모든게 귀찮아 바로 옷을 벗고 잠에 들 것이 뻔하다. 그러므로 여기서 결정하고 가야 하는 것이다.
상갓집에 가는 것과 안가는 것은 양쪽 모두 팽팽한 대립각을 이룬다. 그 사이에 승자를 가리려 노력해 보지만 어느쪽도 쉽사리 물러나지는 않는다. 과연 내가 여기서 뭐하는 짓일까?
이런 식으로 5분정도 지났을 쯤 스스로가 한심해져 왔다. 커피라도 마시면 조금 나을까? 역내에 있는 자판기에서 300원 짜리 싱거운 맛이 나는 커피를 조금 마셔보지만 별로 상황은 나아지질 않는다.
역 안에선 청소부 아줌마들의 청소가 한창이다. 이제 거의 마지막 퇴근 전의 청소라고 생각되지만 주황생을 유니폼을 입고 바닥에 걸레질을 하는 그네들의 자세는 별로 그다지 생기가 넘쳐 흘러 보이진 않는다.
역 안의 열려있는 창문 사이로 바람이 불어오고 그 바람에 맞춰 몇 번의 열차가 더 들어오고 나간다. 그 들어오고 나감의 사이에 달빛 또한 들어오고 나간다. 그리곤 열차도 청소부도 깜빡이던 달빛도 오지 않게 됐지만 난 아직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다.
건너편 선로를 청소하는 아주머니.
겨울이라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될텐데 양동이에 물을 담아 바닥을 열심히 닦는다. 이런 겨울에 저렇게 하면 바닥이 얼어 미끄러울텐데,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 아닌가?
양동이를 들고 그 아줌마는 결국 비틀비틀하더니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지만 양동이의 물을 쏟고 말았다. 저걸 다시 닦을 걸 생각하면 그 동안의 청소는 괜한 짓이 아니었을까.
양동이의 물은 흘러 바닥을 적시고 더 흘러 바닥의 바닥으로 흘러 떨어진다.
아직 아무것도 결정하진 못했지만, 여기서 추위에 벌벌 떠는 자신이 한심스럽다. 그래 집에 가면서 생각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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