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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첩속 거짓말

이상형을 만났을 때

야가다 2020. 4. 24. 20:21

그러니까 나는 굳이 어느쪽이냐라고 꼽는다면 여자를 밝히는 쪽에 속한다. 남자치고 여자를 안 밝히는 사람이 어디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의 경우는 꽤나 심각하다. 처음보는 사람의 사소한 몸짓이나 행동에 반해 멋대로 혼자 상상하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습성이 특별히 나쁘다고 생각치는 않는다. 나는 아직 20대 중반의1 남자니까. 이런건 괜찮은거다,겠지?
 
지하철은 중간중간 정거장을 빼곤 매번 대량의 사람을 태우고 대량의 사람을 뱉어낸다. 그들이 무엇을 입고 무엇을 좋아하고 무슨 음악을 좋아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 개개인들이 뭉뜽그려져 대중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그것이 중요하다. 많은 사람을 비교적 높은 효율에 가능한한 목적지에 가깝게 운송하는 것.
그렇기에 그들은 모두 다르게 생기고 다른 옷을 입었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큰 그림에 묻혀 얼굴도 옷도 심지어는 성별도 같아보였다. 이런 혼란스러움에 약간 현기증이 났지만 나 역시 그들의 모자이크에 한 쪼가리 역할에 불과하다라는 생각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사실 여기서 안심이 된다는 사실이 스스로가 부끄럽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 쪼가리는 언제나처럼 2번째칸(앞에서든 뒤에서든 관계없이) 2번째문으로 들어가 구석진 자리에 앉아 책을 본다. 구석자리 쪽의 유리한 점은 생각보다 크다. 비교적 옆사람의 덩치에 신경을 안써도 되고 옆에 기대어 비교적 편한 자세로 책을 볼수도 있다. 비록 손잡이 구실을 하는 봉이 딱딱해 정거하거나 출발할때 가끔 부딪히는 점 빼면 지하철 구석 자리는 최고의 독서자리다.
책은 최근 유행하는 팩션류의 소설로써 썩 그다지 재미가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팩션류의 소설이 다 그렇듯 고루한 담론이나 이미 진실이 아니라고 판명된 이야기를 '니들은 몰랐지?'라는 느낌으로 장황하게 자랑하며 설명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외에는 줄거리나 표현에 있어서 특별히 관심을 끌만한 부분은 전혀 없었다. 이런 책은 염소 먹이로 주면 어울리지 않을까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쩌면 염소도 이 책을 먹다가 지겨워 하품을 할지도 모른다.
"메에~하아~~흠" 
뭐 이런식으로 말이지. 어쩌면 주인을 때릴지도 모른다. 책을 스테이크 나이프로 T자로 썰은 다음 포크로 찍어 입에 넣는 염소를 상상해 본다. 한입 베어물고는 먹이를 준 주인을 불러 항의를 하는거다.
"이 자식! 뭐야. 요리를 어떻게 한거야? 싱겁잖아!"라고
그럼 먹이를 준 주인은 이러겠지.
"죄송합니다. 손님. 저희 요리사가 아직 서툴러서. 그렇지만 재료만큼은 최고의 신선도를 자랑합니다. 이런 팩션류의 요리는 다빈치 코드 이래 최고 유행하는 소스로서...."
"닥쳐!"
그리고 염소는 와인잔을 들어 주인에게 뿌린다. 그리고 주인은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며 굽신굽신거리는거다.
 
이런 쓰잘데기 없는 상상은 그만두는게 좋겠지. 이런식의 상상은 끝이 없는거다. 난 기지개를 사람들이 눈치 못채게 최대한 작게 피고 지하철 내를 스윽 둘러본다. 모두들 적당히 지루한 표정을 나름대로 지어내고 있다. 나 같은 경우야 이런 지루한 표정이 주특기기에 그다지 힘들지 않지만 이런 표정을 못내는 사람들은 꽤나 괴롭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분명 그들은 여러가지로 고생을 할것이다. 표정을 이렇게 지루하게 오랜시간을 유지하는건 생각보다 힘든일이니까. 어쩌면 집에서 훈련을 하는지도 모르지.
 
옆에 앉은 옆에 앉은 아줌마인지 처녀인지는 무엇때문인지 계속 핸드폰을 만지작만지작 거리고 있다. 누구한테 연락올 곳이라도 있는 건가? 아니면 카메라로 단순히 거울로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꽤나 짙은 화장품 냄새. 난 이 냄새가 싫다.
 
그렇지만 맞은편에 앉은 여자는 달랐다. 그녀는 정말 오랫만에 보는 나의 이상형이었다. 뭐 얼굴이 보이거나 그런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고개를 깊이 숙이고 책을 보고 있었으며 모자를 쓰고 있었다. 단지 내가 보이는 건 하얗고 귀여운 볼살과 새 빨간 입술, 그리고 책장을 넘기는 조그만 손이었다.
그래 사실 난 약간 마른 여자를 싫어하는 편이었다. 이유는 뭐 여러가지 있는데 별로 말하기 싫다. 어쩌면 누구의 말대로 '얼굴만 살찌고 몸은 마른' 여자를 좋아할지도 모르지만 몸이든 얼굴이든 너무 야윈건 보기 좋치 않았다. 적어도 나에겐.
그녀는 정확히 나의 기준에 맞추고 있던 것이다. 사막의 태양처럼 너무 마르지도 파우스트의 두께처럼 너무 살이 찌지도 않았다. 거기에 흰 피부에 립스틱을 칠하지 않은 빨간 입술은 나에겐 너무 자극적이었다.
사실 난 대부분의 남자가 그렇듯이 피부가 좋은 여자가 좋다. 피부가 좋다는 건 조금 애매한데 옥수수를 불에 굽는데 노릿하게 굽느냐 아님 조금 타게 굽느냐와 비슷하다.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자면 흰 피부에 손등을 만졌을때 메마르지 않고 약간 물기가 있는 그런 피부를 좋아한다. 바짝 마른 피부는 왠지 정 떨어지는 느낌이고 그렇다고 손을 잡았을때 땀 때문에 미끈거리는 피부는 불쾌하다. 이 중간 사이를 맞춰야 하는데 굉장히 이는 미묘하다.
어쩃든 조그만 손에 꼼지락거리는 발가락,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책을 읽고 있다는 점까지 여러모로 그녀는 완벽한 내 이상형이었던 것이다.
 
난 어떻게든 그녀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었다. 만약 내가 아르바이트로 하는 곳에 손님으로 왔다면 커피라도 가져다 준 다음 말을 붙혀볼텐데 지하철에선 차마 그러지 못했다. 더구나 지하철이라는 장소도 문제였다. 누구나 그렇듯 지하철은 목적지로 가기위한 수단정도로 여기지 지하철에서 무언가 일어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혹시 시간있으세요?'라고 말을 거는 것은 왠지 뻔하다. 또 그런 뻔함이 통할 만큼 내가 잘난것도 아니었다.
 
요컨데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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