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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고등어를 먹진 않았지만 고등어가 머리부터 내 입에서 뛰쳐 나올 것만 같았다. 예전부터 그랬다. 내가 긴장하거나 기분이 안좋을 때면 항상 뱃속에 무언가 생선이 난동을 피운다는 느낌을 가지곤 했었다. 항상 그 생선이 내 뱃속을 항문부터 장을 거슬러 거꾸로 타고 올라 입으로 나오려 한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데, 그 생선이 고등어라는 이미지를 가진 건 최근의 일이다. 지난 추석에 본가에 들어가 차례를 지내기 위해 장을 보러 간 사이에 어물전에서 전을 하기 위한 대구를 고르다가 본 그 생선 때문이었다. 사실 난 고등어를 먹어 본 적이 없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어머니는 내게 종종 고등어에 알러지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내가 기억이 없을 무렵에 큰 일을 치루고는 우리집은 그 후로 고등어를 먹지 않았..
내가 좀 더 어린 12살의 무렵엔 나는 누구나 그랬듯이 어느면에선 다른 아이보다 뛰어나고 어느면에선 다른 아이보다 쳐지는 산술적으로본다면 극히 평범한 아이였다. 그러나 이런 통계적 평범함이 가지는 함정을 반영하듯 실제로 나는 꽤 문제가 많은 - 어쩌면 이런 문제도 편차 안에 들어가는 문제 일지도 모르지만 - 학생이었다. 또래 아이들과 달리 난 뛰는 것이 무척 싫었고 체육시간에 반 강제적으로 축구를 시켜도 그 누구도 하지 않는 골키퍼나 수비수를 자청해서 했으며 대신 매일 2차세계대전사나 각종 어린이용으로 나온 갈색 하드커버 소설들을 읽곤 했다. 그렇다고 그렇게 책을 읽은만큼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난 아무리 애를써도 한국의 주요 텅스텐 생산지가 어딘지 몰랐고 - 현재까지 모른다. - 어떤 광물이 주..
아무것도 쓸 것이 없다는 것은 꽤 괴로운 일이다. 뭐든 써야 한다고 하는 강박관념이나 의무감은 있는데 뭘 써야 할 지도 어떻게 전개해 나가야 할지도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결국 이번에도 또한 내 이야기를 써야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쓰고 싶었던 건 평범한 러브스토리인데. 아무튼 그러니까 결국엔 이번에도 내 이야기인 것이다. 매번 나는 삶이라는 것은 연속적인 것인가 혹은 단편적인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이다. 길고 짧은 두 가지의 인생은 티비 극으로 비유를 한다면, 짧은 미니시리즈, 긴 장편 일일 연속극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보면 복잡한 다차원 그래프처럼 어느순간의 서로 다른 두 x의 결과값처럼 전혀 인생은 단절되고 연결되어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분을 해 간극을 무..
내가 글을 쓰게 될 것이라고 최초로 예상을 한 사람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문학 선생이었다. 20대 중후반, 지금의 내 나이 정도로 생각되던 그 선생은 언제나 표정을 세상이 지겨워 죽겠다는 식으로 짓고 있었는데, 그런 점을 뺀다면 꽤나 단아한 얼굴에 매일입고 오는 - 비슷한 옷이 여러벌 인듯 했다.- 브라우스, 뒤로 깔끔하게 흐트러짐 없이 묶고 오는 그 머리는 그 선생을 정숙하고 단아한 한국적인 미인의 모습으로 보이게 하기 충분했다. 매일 같이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수업을 진행했지만 그 단아한 외모 때문에 그 선생은 학생들 사이에서 꽤 인기가 좋았고 그런 그 선생에게 또래 아이들보다 조금 나은 글을 쓴다는 이유로 칭찬을 받는 것은 매우 기분좋은 일이었다. 그렇지만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난 글을 쓰지 않게 ..
사실 잠이 깰 때는 언제나 그렇지만 정신은 어스럼히 깨어 있다. 그러나 그런 서툰 잠을 조각 내는 것은 이 세상을 온통 뒤흔들것 같은 알람소리다. 잠결에 난 쩌렁쩌렁 알람을 울리는 전화기를 들고 시간을 확인한다. 시간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거의 언제나 같다. 새벽 여섯시. 아직 30분은 괜찮아. 아직 30분은 괜찮아. 난 다시 누울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일어날 것인가에 대해 앉아서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언제나 다시 눕는 쪽이 이긴적은 한번도 없다. 시계를 보니 여섯시 십오분, 다시 눕는 쪽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냉장고 문을 열어 물을 찾지만 물은 없다. 주전자를 들어 입을 대어보지만 주전자도 비어있었다. 어젯밤에 물을 끓여놓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셔츠를 입고 타이를 메기..
내가 군대에 막내로 있었을 때 나보다 세살이 많던 ㅅ형님은 내게 많은 것을 이야기 해 주었다. 대부분 날 기독교도로 만들려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들이었지만, 아무래도 신심이 없던 나는 좀처럼 그 이야기에 동화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 형님이 내게 해줬던 말중에 아직도 내게 말뚝처럼 머릿속에 깊숙히 박힌 말이 있었는데, 그건 "난 모든 걸 용서했다."라는 말이었다. 그랬다. 그 형은 모든 것을 용서한 듯 보였다. 후임이 무언가를 잘못하거나 실수해도 혼내지 않았고 온화한 인품은 선임들이나 간부들과의 사이도 좋게 만들었으며 누구도 그 형님을 싫어하지 않았다. 물론 나를 제외하곤 말이다. 내가 좋아하지 않았던건 그 형님이 내게 큰 해꼬지를 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형님은 누구보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새로 신발을 사고 난 다음은 언제나 한 두달은 그 신발 때문에 연례행사처럼 고생하곤 한다. 흔히 말하는 '길을 들이는' 기간 때문인데 신발의 종류에 따라 그 기간은 다르지만 보통은 짧게 한달, 길게는 세달까지 가곤 한다. 물론 그 증상 또한 신발에 따라 천차만별 달라서 이번에 새로 산 신발은 오른쪽 새끼 발가락에 엄지 손가락만한 물집과 왼쪽 발 뒷꿈치에 쓸려서 생긴 것 같은 상처를 안겨 주었다. 이런 상처로 걸을 때마다 생기는 고통은 꽤 대단한 것이어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성욕, 식욕등을 싹 없앨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렇게 아픈 발을 끌고 수업을 받으러 학교에 가거나, 집으로 돌아오거나, 어디를 놀러가거나 이렇게 돌아다니다보면 아무래도 평소보다 걸음이 많이 느려지게 되고, 그 느려지는 걸..
내가 이 곳에 정착을 하며 살게 된 것은 겨우 2년정도 남짓 됐다. 2년전보다 더 오래전의 나는 남쪽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조선소 자재 창고지기를 하고 있었다. 이 쪽의 업계가 거의 다 그렇듯이 조직에서는 말단이지만 그래도 관리직인 나는 여러 하청업체에게 향응 제공의 유혹을 받고 있었다. 그런 향응은 처음에는 허름한 식당에서 삼겹살에 소주정도로 시작했지만 날이 갈수록 그러한 접대는 점점 커져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점점 도저히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원래 그런 접대성 향응이란 것이 100의 이득을 목적으로 할 때 5정도를 대접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나는 점점 과연 이들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의 규모는 어느정도일까 두려웠었고 매일매일 상부기관에서의 감사에 대한 공포나 향응을..
술을 잔뜩 퍼마시고 일어나는 다음 날 아침에는 정말 견디기 힘든 것이 두가지 있다. 하나는 내 지독한 입냄새, 또 다른 하나는 나와 다른 입냄새를 풍기며 알몸으로 고꾸라져 있는 여자가 그것이다. 난 그 두 입냄새를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내가 배던 베개를 그 여자 얼굴 위로 덮어놓고 양치하러 일어났다. 근데 저 여자는 누구였더라? 뭐 또 똑같은 그저 그런 여자이겠지. 이를 닦으며 거울을 보니 몰골이 말이 아니다. 눈은 퀭한게 다크서클이 짙에 드리워져 내일이라도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고 수염은 하룻밤에 1센티는 자란 듯 했다. 어젯밤에 어지간히 퍼 마신 모양이다. 이를 닦다보니 샤워하고 싶었다. 팬티를 벗고 샤워를 한다. 이걸로 술 냄새는 없어지겠지만 내 고환의 정충은 아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